이데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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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체 가설은 $\aleph_1 = 2^{\aleph_0}$가 성립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는 비가산 집합 중 실수 집합보다 크기가 작은 집합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과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연속체 가설은 ZFC에서 증명과 반증이 불가능하지만, 몇몇 제한적인 경우에 대해서는 증명할 수 있다. 일찍이 칸토어는 연속체 가설을 실수의 닫힌집합으로 제한할 경우 성립함을 증명했다.
정리. $F \subseteq \mathbb{R}$이 닫힌집합이라면 $|F| = \aleph_0$이거나 $|F| = 2^{\aleph_0}$이다.
이 정리의 증명은 완벽한 집합perfect set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칸토어-벤딕슨 정리를 다루며 소개한 적 있지만 다시 소개하겠다.
정의. 위상공간 $X$에 대해 $P \subseteq X$가 완벽하다는 것은 $P = P’$이라는 것이다. ($P’$은 $X$에 대한 $P$의 극점limit point들의 집합)
일반적으로 부분집합 $A \subseteq X$에 대해 $A$와 $A’$이 서로 포함 관계가 아닌 이유는 두 가지이다:
따라서 완벽한 집합은 고립점을 가지지 않는 닫힌집합이다. 이에 따라, 어떤 닫힌집합 $F$가 주어졌을 때 $F$의 고립점들을 모두 ‘덜어’ 내면 완벽한 집합이 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다. 문제는, 고립점을 덜어 낸 집합이 또다시 고립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F = \mathbb{N} \cup \lbrace m - 1/n : m \geq 0, n > 1 \rbrace\]일 때, $F$의 고립점들을 덜어 낸 집합은 $\mathbb{N}$으로 또다시 가산 개의 고립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같이 고립점을 ‘덜어’ 내는 과정을 초한귀납적으로 반복한다면 다음의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칸토어-벤딕슨 정리. $F \subseteq \mathbb{R}$가 닫힌집합이라면 어떤 가산집합 $C$와 완벽한 집합 $P$가 존재하여 $F = P \sqcup C$이다.
증명. 앞선 링크에 증명이 소개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칸토어의 증명을 소개한다.
초한귀납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하자.
\[\begin{gather} F_0 = F \\ F_{\alpha + 1} = F_\alpha' \\ F_\lambda = \bigcup_{\alpha < \lambda} F_\alpha \quad (\lim \lambda) \end{gather}\]다음을 관찰하라.
만약 모든 $\alpha \in \mathrm{Ord}$에 대해 $F_{\alpha} \setminus F_{\alpha+1} \neq \varnothing$이었다면 $\mathcal{P}(F)$의 하르토그 수 $\gamma$에 대해 $f : \gamma \to \mathcal{P}(F); \alpha \mapsto F_{\alpha} \setminus F_{\alpha + 1}$가 단사이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F_{\xi} \setminus F_{\xi+1} = \varnothing$인 $\xi$가 존재한다. 따라서 $P = F_\xi$로 두면 $P$는 공집합이거나 완벽한 집합이다.
$C = F \setminus P$라고 하자. $\mathcal{B} = \lbrace B_n \rbrace $이 $\mathbb{R}$의 가산 기저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f: C \to \omega$를 정의한다.
\[f(x) = \mathop{\arg \min}\limits_{n \in \omega} : B_n \cap F_\alpha = \{ x \} \quad (x \in F_\alpha \setminus F_{\alpha + 1})\]$f$가 well-defined이며 단사임을 확인하라. ■
정리. $P \subseteq \mathbb{R}$이 공집합이 아닌 완벽한 집합이라면 $|P| = 2^{\aleph_0}$이다.
증명. 다음의 두 보조정리를 증명한다.
보조정리. $P \subseteq \mathbb{R}$이 공집합이 아닌 완벽한 집합이라면, 어떤 공집합이 아니며 완벽한 서로소 집합 $P_1, P_2 \subset P$가 존재한다.
증명. $\alpha = \inf P, \beta = \sup P$라고 하자 ($\alpha, \beta$는 $\pm \infty$일 수도 있다). $(\alpha, \beta) \subset P$라면 $\alpha < r < s < \beta$인 임의의 $r, s$에 대해 $P \cap (-\infty, r], P \cap [s, \infty)$가 조건을 만족한다. $(\alpha, \beta) \not\subset P$라면, 어떤 $x \in (\alpha, \beta)$가 존재하여 $x \notin P$이다. $P = P’$이므로, $x$는 $P$의 극점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충분히 작은 $\delta > 0$가 존재하여 $(x - \delta, x + \delta)$가 $F$와 서로소이고 $\alpha < x - \delta, x + \delta < \beta$이다. 이때 $P \cap (-\infty, x - \delta], P \cap [x + \delta, \infty)$가 조건을 만족한다. □
보조정리. $P \subseteq \mathbb{R}$이 공집합이 아닌 완벽한 집합이라면, 임의의 $n > 0$에 대해 어떤 공집합이 아니며 완벽한 집합 $P’ \subset P$가 존재하여 $\mathrm{diam} P’ < 1/n$이다.
증명. $\mathcal{J} = \lbrace (m/n, (m+1)/n) : m \in \mathbb{Z} \rbrace $에 대해, 어떤 $(k/n, (k+1)/n) \in \mathcal{J}$가 존재하여 $J \cap F \neq \varnothing$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P = \lbrace m/n : m \in \mathbb{Z} \rbrace $이므로 완벽하지 않다). $E = F \cap [k/n, (k+1)/n]$이라고 하자. $E$는 닫힌집합이므로, $E$가 고립점을 가지지 않는다면 $E$는 완벽하다. 만약 $x \in E$가 고립점이라면 어떤 충분히 작은 $\delta > 0$가 존재하여 $E \cap (x - \delta, x + \delta) = \lbrace x\rbrace $이고 $k/n < x - \delta, x + \delta < (k + 1)/n$이다. 이때 $F \cap (x - \delta, x + \delta) = \lbrace x\rbrace $이므로 $x$는 $F$의 고립점이다. 이는 모순이므로, $E$는 완벽하다. □
$P$가 공집합이 아닌 완벽한 집합이라고 하자. 위 두 보조정리로부터, 선택 공리를 사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귀납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모든 $P_i$의 교집합을 $A$라고 하자. $A$는 칸토어 집합과 크기가 같다. 그런데 칸토어 집합은 실수와 크기가 같으므로, $|P| = 2^{\aleph_0}$이다. ■
위 정리와 칸토어-벤딕슨 정리로부터 다음 결과가 얻어진다.
따름정리. $F \subseteq \mathbb{R}$이 닫힌집합이라면 $|F| = \aleph_0$이거나 $|F| = 2^{\aleph_0}$이다.
참고로 칸토어-벤딕슨 정리와 비슷한 결과가 보렐 집합에서 성립한다.
정리. $B \subseteq \mathbb{R}$이 비가산 보렐 집합이라면 $B$는 완벽한 집합을 포함한다.
증명. 생략.
따라서 보다 일반적으로 다음이 성립한다.
따름정리. $B \subseteq \mathbb{R}$이 보렐 집합이라면 $|B| = \aleph_0$이거나 $|B| = 2^{\aleph_0}$이다.
이 글에서 모든 집합과 기수는 무한하다.
기수 산술cardinal arithmetics을 다룰 때에는 각 연산의 정의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의와 정리를 혼동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먼저 기수 덧셈부터 보자.
정의. $A, B$가 각각 기수가 $\kappa, \lambda$인 서로소 집합이라고 하자. $\kappa + \lambda$를 $|A \cup B |$로 정의한다.
정리. 기수의 유한 덧셈은 교환법칙과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위 정의가 well-defined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kappa + \lambda$가 $A, B$의 선택에 의존적이지 않음을 보여야 한다. 이는 ZF에서 쉽게 증명 가능하다. 또한 유한한 기수 덧셈은 그저 최대 기수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산하기가 상당히 용이하다.
정리. \(\kappa + \lambda = \mathrm{max}(\kappa, \lambda)\)
증명. “2. 기수 곱셈”의 보조정리와 칸토어-베른슈타인 정리에 의해, $\aleph_\alpha = \aleph_\alpha + \aleph_\alpha$이다. 따라서 $|A| \leq |B|$라면 $|B| \leq |A + B| \leq |B + B| = |B|$이다. ■
기수 덧셈의 정의를 무한한 경우로 확장하면,
정의. 각 $i \in I$에 대해 $A_i$가 기수 $\kappa_i$인 쌍으로 서로소인 집합족 $\lbrace A_i \rbrace $가 주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sum_{i \in I} \kappa_i = \left| \bigcup_{i \in I}A_i \right|\]
유의할 점은, 위 정의가 well-defined임을 보이는 데는 선택 공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각 $i \in I$에 대해 일대일 대응 $A_i \to \kappa_i$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수 산술을 다룰 때에는 거의 언제나 선택 공리를 전제한다.
$\kappa + \lambda = \mathrm{max}(\kappa, \lambda)$ 관계식으로부터 다음의 관계식을 유도하고 싶을 수 있지만, 성립하는 식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주의. $\sum_{i \in I} \kappa_i = \sup \kappa_i$는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한한 기수 덧셈은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기수 곱셈을 정의하자.
정의. $A, B$가 각각 기수가 $\kappa, \lambda$인 집합이라고 하자. $\kappa \cdot \lambda$를 $| A \times B|$로 정의한다.
정리. 기수의 유한 곱셈은 교환법칙과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아주 용이하게도 유한 기수 곱셈의 계산은 유한 기수 덧셈의 계산과 같다.
정리. \(\kappa \cdot \lambda = \mathrm{max}(\kappa, \lambda)\)
증명. 다음의 보조정리로부터 따라 나온다. ■
보조정리. 임의의 $\alpha \in \mathrm{Ord}$에 대해, $\aleph_\alpha \cdot \aleph_\alpha = \aleph_\alpha$
증명 개요는 다음과 같다. 임의의 $\alpha \in \mathrm{Ord}$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된 순서 $\prec$가 $\omega_\alpha \times \omega_\alpha$의 정렬 순서임을 보인다. $\hat{x} = \mathrm{max}(x_1, x_2), \hat{y} = \mathrm{max}(y_1, y_2)$일 때,
\[(x_1, x_2) \prec (y_1, y_2) \iff \begin{cases} \hat{x} < \hat{y}\\ x_1 < y_1 \quad (\text{if }\hat{x} < \hat{y}) \\ x_2 < y_2 \quad (\text{if }\hat{x} < \hat{y}, x_1 = y_1) \\ \end{cases}\]즉, $\prec$은 최댓값 우선 후 사전식 순서이다. 초한귀납법에 따라 모든 $\beta < \alpha$에 대해 $\aleph_\beta \cdot \aleph_\beta = \aleph_\beta$일 때 $\aleph_\alpha \cdot \aleph_\alpha = \aleph_\alpha$임을 보인다. 이를 위해 $(\omega_\alpha \times \omega_\alpha, \prec)$의 순서형order type이 $\omega_\alpha$를 넘지 않음을 보이면 된다. 이를 위해 임의의 $(\gamma_1, \gamma_2) \in \omega_\alpha \times \omega_\alpha$에 대해
\[X = \{ (\xi_1, \xi_2) : (\xi_1, \xi_2) \prec (\gamma_1, \gamma_2) \}\]라면 $|X| < \aleph_\alpha$임을 보이면 된다. $\gamma = \mathrm{max}(\gamma_1, \gamma_2) + 1$이라고 하자. $\omega_\alpha$는 극한 서수이므로 $\gamma \in \omega_\alpha$이며, 따라서 $|\gamma| = \aleph_\delta \; (\delta < \alpha)$이다. 한편으로 $X \subseteq \gamma \times \gamma$이므로 $|X| \leq \aleph_\delta \cdot \aleph_\delta$이며 이는 귀납 가정에 의해 $\aleph_\delta$이다. ■
기수 곱셈의 정의는 기수 덧셈과 아무 관련이 없다. 즉, 기수 곱셈의 정의에는 “$\kappa$를 $\lambda$번 더한다”와 같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다음 정리에 의해 기수 곱셈을 기수 덧셈과 연관지을 수 있다.
정리. \(\sum_{i \in I} \kappa = |I| \cdot \kappa\)
증명. $\lbrace A_i \rbrace $가 쌍으로 서로소이며 $|A_i| = \kappa$인 집합족이라고 하자. 좌변은 $\bigcup_{i \in I} A_i$의 기수이고, 우변은 $I \times A$의 기수이다 $(|A| = \kappa)$. 선택 공리에 의해 각 $i \in I$에 대해 일대일 대응 $f_i : A_i \to A$를 정의할 수 있다. 다음의 대응 $f: \bigcup_{i \in I} A_i \to I \times A$을 정의하자.
\[f(x) = (i, f_i(x)) \quad (\text{if } x \in A_i)\]위 함수가 일대일 대응임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좌변) = (우변)이다. ■
이로부터 앞선 언급한 “주의”에 해당되는 올바른 관계식을 증명할 수 있다.
정리. \(\sum_{i \in I} \kappa_i = |I| \cdot \sup \kappa_i\)
증명. $\kappa = \sup \lbrace \kappa_i : i \in I \rbrace $라고 하고, 좌변을 $L$, 우변을 $R$이라고 하자. 앞선 정리에 의해 $|I| \cdot \kappa = \sum_{i \in I} \kappa$이고 $\kappa_i \leq \kappa$이므로 $L ≤ R$이다. 반대로, $| I | = \sum_{i \in I} 1 \leq L$이고, $\kappa = \sup \kappa_i \leq L$이다. 글 하단의 보조정리에 의해 $L = L \cdot L$이므로 $L \geq | I | \cdot \kappa = R$이다. 따라서 칸토어-베른슈타인 정리에 의해 $L = R$이다. (이 증명에는 선택 공리가 암시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니 관심 있는 독자는 생략된 논증을 자세히 써 봐도 좋을 것이다) ■
이제 기수 곱셈도 무한 경우로 일반화하자.
정의. 각 $i \in I$에 대해 $A_i$가 기수 $\kappa_i$인 집합족 $\lbrace A_i \rbrace $가 주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prod_{i \in I} \kappa_i = \left| \prod_{i \in I}A_i \right|\]
기수 곱셈을 계산할 때 쾨니히 정리König’s Theorem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쾨니히 정리. 인덱스 집합 $I$에 대해 $\kappa_i < \lambda_i$라고 하자. 다음이 성립한다.
\[\sum \kappa_i < \prod \lambda_i\]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1, 2는 고사하고 3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물론 1, 2, 3에서 결론부의 부등호를 $<$에서 $\leq$로 약화하면 모두 성립한다. 쾨니히 정리의 특징은 결론부가 엄격한 부등호라는 것이다.
증명. $\lbrace A_i \rbrace , \lbrace B_i \rbrace $가 각각 기수가 $\kappa_i, \lambda_i$인 (쌍으로 서로소인) 집합들의 모임이라고 하자. 귀류법에 따라, $f: \prod B_i \to \cup A_i$인 단사함수가 존재한다고 하자. 임의의 $i \in I$에 대해, $f$의 단사성으로부터 $|f^{-1}(A_i)| = |A_i|$이다. 그런데 $|A_i| < |B_i|$이므로 $\pi_i (f^{-1}(A_i)) \subset B_i$는 $B_i$보다 크기가 엄격히 작으며, 이에 따라 $b_i \in B_i \setminus \pi_i (f^{-1}(A_i))$가 존재한다. 각 $i$에 대해 그러한 $b_i$를 고른 뒤, $b = (b_i)_{i \in I}$를 생각하면, 임의의 $i \in I$에 대해 $\pi_i(b) = b_i$이므로 $f(b) \notin \cup A_i$가 되어 모순이다. ■
정의. $A, B$가 각각 기수가 $\kappa, \lambda$인 집합이라고 하자. $\kappa^\lambda$를 $|A^B |$로 정의한다. ($A^B$는 $B$에서 $A$로 가는 함수들의 집합이다)
기수 곱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록 기수 지수의 정의는 기수 곱셈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다음 정리에 의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정리. \(\prod_{i \in I} \kappa = \kappa^{|I|}\)
또한 기수 지수는 일반적인 지수의 여러 좋은 성질을 공유한다.
정리. 기수의 지수 연산은 지수법칙을 만족한다. 즉,
- $\kappa^{\lambda + \mu} = \kappa^\lambda \cdot \kappa^\mu$
- $(\kappa^\lambda)^\mu = \kappa^{\lambda \cdot \mu}$
- $(\kappa \cdot \lambda)^{\mu} = \kappa^\mu \cdot \lambda^\mu$
그럼에도 기수 지수를 정확히 계산하기란 굉장히 까다로운데, 일반화된 연속체 가설Generalized Continuum Hypothesis을 전제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일반화된 연속체 가설 없이 증명할 수 있는 정리들을 보자.
정리.
- $2^{\aleph_\alpha} > \aleph_\alpha$
- $\alpha \leq \beta \implies \kappa^{\aleph_\alpha} \leq \kappa^{\aleph_\beta}$
- $\mathrm{cf}(\kappa^{\aleph_\alpha}) > \aleph_\alpha$
$\mathrm{cf}(\kappa) \leq \kappa$이므로 3이 1을 함의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증명. 1은 칸토어의 정리이고, 2는 선택 공리를 사용하면 자명하다. 3의 증명은 쾨니히 정리를 사용한다. $\mathrm{cf}(\kappa^{\aleph_\alpha}) = \aleph_\lambda$라고 하자. $\mathrm{cf}$의 정의에 의해 $\xi_i < \kappa^{\aleph_\alpha}$이며 $\sum_{i < \omega_\lambda} \xi_i = \kappa^{\aleph_\alpha}$을 만족하는 $\lbrace \xi_i \rbrace _{i < \omega_\lambda}$가 존재한다. 쾨니히 정리에 의해 다음이 성립한다.
\[\kappa^{\aleph_\alpha} = \sum_{i < \omega_\lambda} \xi_i < \prod_{i < \omega_\lambda} \kappa^{\aleph_\alpha} = \kappa^{\aleph_\alpha \cdot \aleph_\lambda}\]그런데 만약 $\aleph_\lambda = \aleph_\alpha$라면 $\kappa^{\aleph_\alpha \cdot \aleph_\lambda} = \kappa^{\aleph_\alpha}$이므로 $<$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aleph_\lambda > \aleph_\alpha$이다. ■
다음의 두 정리는 특히 유용하다.
정리.
\[\aleph_\alpha^{\aleph_\beta} = \begin{cases} 2^{\aleph_\beta} & (\aleph_\alpha \leq \aleph_\beta) \\ \mathrm{card} \{ A \subseteq \omega_\alpha : |A| = \aleph_\beta \} & (\aleph_\beta < \aleph_\alpha) \end{cases}\]
증명. $\aleph_\alpha \leq \aleph_\beta$인 경우의 증명은 다음과 같다.
\[2^{\aleph_\beta} \leq \aleph_\alpha^{\aleph_\beta} \leq (2^{\aleph_\alpha})^{\aleph_\beta} = 2^{\aleph_\alpha \cdot \aleph_\beta} = 2^{\aleph_\beta}\]$\aleph_\alpha > \aleph_\beta$인 경우를 증명하자. 좌변의 집합을 $S$라고 하자. 각 $S$의 원소는 $\aleph_\beta$에서 $\aleph_\alpha$로 가는 단사함수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S| \leq {\aleph_\alpha}^{\aleph_\beta}$이다. 역방향을 보이기 위해 먼저 $\aleph_\beta < \aleph_\alpha$이므로 $\aleph_\alpha = \aleph_\beta \cdot \aleph_\alpha$임을 관찰하자. 따라서,
\[|S| = |T| \quad \text{where} \quad T = \{ A \subseteq \omega_\beta \times \omega_\alpha : |A| = \aleph_\beta \}\]그런데 $T$의 각 원소는 $\omega_\alpha$에서 중복을 허용하고 $\aleph_\beta$개의 원소를 뽑는 경우의 수로 생각될 수 있다. 이는 $T$에서 ${\aleph_\alpha}^{\aleph_\beta}$로 가는 전사 관계를 정의한다. 따라서 ${\aleph_\alpha}^{\aleph_\beta} = |S|$이다. ■
이의 따름정리는 하우스도르프 정리이다.
하우스도르프 정리.
\[\aleph_{\alpha+1}^{\aleph_\beta} = \aleph_\alpha^{\aleph_\beta} \cdot \aleph_{\alpha + 1}\]
증명. $\beta > \alpha$라면 앞선 정리에 의해 정리가 자명하게 성립한다. 따라서 $\beta \leq \alpha$라고 하자. $\aleph_{\alpha+1}^{\aleph_\beta} \geq \aleph_\alpha^{\aleph_\beta}, \aleph_{\alpha + 1}$이므로 $\geq$ 방향은 자명하게 성립한다. 따라서 $\leq$ 방향을 보이면 충분하다.
$\aleph_{\alpha + 1}$은 계승자 기수successor cardinal이므로 정칙regular이며, 이에 따라 $\aleph_\beta < \mathrm{cf}(\aleph_{\alpha + 1})$이다. 따라서 $f \in \omega_\alpha^{\omega_\beta}$는 상계를 가진다. 즉,
\[\aleph_{\alpha+1}^{\aleph_\beta} = \bigcup_{\gamma < \omega_{\alpha + 1}} \gamma^{\omega_\beta}\]여기서 각 $\gamma$는 기수가 $\aleph_\alpha$ 이하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aleph_{\alpha+1}^{\aleph_\beta} \leq \sum_{\gamma < \omega_{\alpha + 1}} |\gamma|^{\aleph_\beta} \leq \sum_{\gamma < \omega_{\alpha + 1}} {\aleph_\alpha}^{\aleph_\beta} = {\aleph_\alpha}^{\aleph_\beta} \cdot \aleph_{\alpha + 1} \quad \blacksquare\]일반화된 연속체 가설을 전제하면 훨씬 더 강력한 결과들을 증명할 수 있다.
정리. $\aleph_\alpha$가 정칙 기수인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aleph_\alpha^{\aleph_\beta} = \begin{cases} \aleph_{\beta + 1} & \aleph_\alpha \leq \aleph_\beta \\ \aleph_{\alpha} & \aleph_\beta < \aleph_\alpha \end{cases}\]
증명. $\aleph_\alpha \leq \aleph_\beta$인 경우 $\aleph_\alpha^{\aleph_\beta} = 2^{\aleph_\beta}$이므로 GCH에 의해 성립한다. $\aleph_\alpha > \aleph_\beta$인 경우,
\[\aleph_\alpha^{\aleph_\beta} = |S| \quad \text{where} S = \{ A \subseteq \omega_\alpha : |A| = \aleph_\beta \}\]이다. $\aleph_\alpha$가 정칙이므로 $S$의 각 원소는 유계이다. 따라서,
\[S \subseteq \bigcup_{\lambda \in \omega_\alpha} \mathcal{P}(\lambda)\]이다. 임의의 $\lambda \in \omega_\alpha$에 대해 $|\lambda| = \aleph_\delta$라고 하면, $\aleph_\delta < \aleph_\alpha$이므로 $2^{|\lambda|} = \aleph_{\delta + 1} < \aleph_\alpha$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begin{align} |S| &\leq \sum_{\lambda \in \omega_\alpha} 2^{|\lambda} \\ &\leq \sum_{\lambda \in \omega_\alpha} \aleph_\alpha \\ &= \aleph_\alpha \cdot \aleph_\alpha = \aleph_\alpha \quad \blacksquare \end{align}\]정리. $\aleph_\alpha$가 특이 기수인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aleph_\alpha^{\aleph_\beta} = \begin{cases} \aleph_{\beta + 1} & \aleph_\alpha \leq \aleph_\beta \\ \aleph_{\alpha + 1} & \mathrm{cf}(\aleph_\alpha) \leq \aleph_\beta < \aleph_\alpha \\ \aleph_{\alpha} & \aleph_\beta < \mathrm{cf}(\aleph_\alpha) \end{cases}\]
증명. 첫 번째 경우와 세 번째 경우는 이전 정리의 증명과 거의 같으므로, 두 번째 경우만 살펴보자. 다음이 성립한다.
\[\aleph_\alpha \leq \aleph_\alpha^{\aleph_\beta} \leq \aleph_\alpha^{\aleph_\alpha} = 2^{\aleph_\alpha} = \aleph_{\alpha+1}\]따라서 $\aleph_\alpha < \aleph_\alpha^{\aleph_\beta}$임을 보이면 충분하다. 만약 $\aleph_\alpha = \aleph_\alpha^{\aleph_\beta}$라면 $\mathrm{cf}(\aleph_\alpha) = \mathrm{cf}(\aleph_\alpha^{\aleph_\beta}) > \aleph_\beta$인데, 가정에 의해 $\mathrm{cf}(\aleph_\alpha) \leq \aleph_\beta$이므로 모순이다. ■
어느 날 디멘은 외계인을 만났습니다. 외계인이 디멘에게 물었습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 중에서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 도대체 자연수가 뭐야?
뭐긴 뭐야. 자연수란 1부터 시작해서 2, 3, … 이렇게 순서대로 나아가는 수 체계야.
외계인음…그러면 이것도 자연수야?
엥, 그럴 리가! 자연수는 끝없이 이어져.
외계인끝없이 이어진다고? 고리를 이룬다는 말인가? 그럼 1, 2, 3, 4, 5, 3, 4, 5, 3, 4, 5, …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데.
맙소사, 그 뜻이 아니야. 고리 같은 거 없이 끝없이 이어져.
외계인흠...그럼 중간에 가지라도 치나?
그것도 아니야! 가지는 없어!
외계인알겠어. 그렇다면 혹시 $c$도 자연수니?
디멘$c$라니, 무슨 말이야?
외계인너가 알려준 자연수의 정의대로라면 $c$가 자연수가 아닐 이유는 없는데? 자연수는 끝없이 이어진다고 했지만 모든 자연수가 그러한 연쇄에 포함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잖아.
저건 또 뭐야... 자연수에는 자연수밖에 없어!
외계인자연수에는 자연수밖에 없다니, 순환논법이 따로 없네.
디멘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외계인무슨 소리야, 난 진짜 자연수가 뭔지 모르겠어. 너야말로 자연수의 정의를 제대로 알려줘야 내가 이해를 할 거 아니야.
디멘자연수란...음...그러니까...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 순간, 데데킨트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 주지. 자연수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을 말해.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내가 증명해 놓았으니 더 이상 오해의 여지라고는 없지.
데데킨트의 자연수 정의. 집합 $A$, 원소 $e \in A$, 그리고 함수 $S: A \to A$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면 $A, e, S$는 각각 자연수 집합, $0$, 그리고 $x \mapsto x + 1$에 대응된다.
- $S(x) = e$를 만족하는 $x$는 존재하지 않는다.
- $S(x) = S(y)$라면 $x = y$이다.
- $A$를 정의역으로 하는 임의의 명제 $P(x)$에 대해 다음 두 조건이 성립한다면 $P(x)$는 $A$의 모든 원소에 대해 참이다.
- $P(e)$가 참이다.
- $P(x)$가 참이라면 $P(S(x))$가 참이다.
데데킨트의 대답에 외계인은 흡족해했지만, 이내 또다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세 번째 조건에 "임의의 명제"라는 표현이 말이 돼? $P(x)$가 임의의 명제라면 $P(x)$는 "$x$가 자연수이다" 가 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자연수의 정의에 자연수에 대한 명제가 포함되는 건 순환논법일 텐데?
데데킨트엇...그런가...?
외계인애초에 "명제"라는 것이 정확히 뭐야? "$x$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다" 는 잘 정의된 명제야?
디멘(만약 $x$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라면 $x$는 $x$의 정의에 해당하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게 되고, $x$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라면 $x$는 $x$의 정의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게 되고...엥?)
뜻밖의 지적에 데데킨트가 우물쭈물하자 옆에서 뢰벤하임이라는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확실히 "임의의 명제"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어 보이네. 아무래도 수학에서 이런 표현은 제한해야겠어. 이렇게 제한된 논리학을 1차 논리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1차 논리로 자연수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이 말에 스콜렘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맞아. 그리고 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어.
스콜렘의 발언에 모두가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불가능해. 1차 논리로는 자연수의 필요충분조건을 기술할 수 없어. 구체적으로, 자연수의 정의를 시도하는 모든 1차 논리적 정의에는 자연수가 아닌 반례가 존재해. 따라서 자연수는 논리로 환원될 수 없어. 자연수를 순환논법 없이는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이야.
뢰벤하임-스콜렘 정리. 자연수를 비롯하여, 원소가 무한히 많은 수 체계는 1차 논리로 유일하게 특정될 수 없다.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자연수가 뭔지 아는 거야? 알고 보면 인간들은 저마다 자연수를 다르게 알고 있는 거 아냐?
외계인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신기루 같은 자연수의 실체에 대해 할 말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Note.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왜곡된 역사적 · 수학적 · 철학적 내용이 있습니다. 1차 논리의 탄생은 뢰벤하임을 비롯한 여러 수학자들의 점진적인 연구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데데킨트의 자연수 정의가 사용하는 2차 논리가 정말로 순환적인지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콜렘의 역설은 자연수에 관한 것이 아닌 집합론에 관한 것인데,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두 현상은 유사하기 때문에 말풍선에 넣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작성한 소논문입니다. 원문이 영문으로 작성되었고, 주제 또한 영미철학이기 때문에, 영문 버전이 글 자체는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영문 버전은 블로그 상단의 토글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PDF 버전: 링크)
이 글은 원초적 지향성original intentionality에 대한 데넷의 회의주의와 자연주의적 목적론natural teleology에 의미를 기초짓고자 하는 그의 시도를 검토한다. 첫째, 데넷의 회의주의가 의존하는 불확정성 문제indeterminacy problem는 그 자체로 원초적 지향성을 반박하지 못한다고 논증한다. 둘째, 논리에 대한 자연주의적 목적론 설명은 순환논리에 빠진다고 논증한다. 따라서 논리는 원초적 지향성이 성립해야 하는 영역임을 결론내린다.
데넷(1981)은 마음의 지향성을 둘러싼 논의에서 중대한 견해 차이를 관찰한다. 이 견해 차이는 원초적 지향성에 관한 것이다. 데넷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원초적 지향성 논제는 우리의 인공물 중 일부는 우리로부터 파생된derived 지향성을 가지지만, 우리는 완전히 파생되지 않은 원초적 지향성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데넷은 다음 예시로 이를 설명한다. 미국 동전을 받아들이는 자판기를 생각해보자. 자판기가 미국 동전을 받아들일 때 기계는 x는 미국 동전이다를 “의미하는” 상태 Q에 들어간다고 하자. 흥미롭게도 자판기는 파나마 동전과 미국 동전을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판기가 파나마 동전을 받아들일 때, 기계가 상태 Q에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잘못된” 표상), 아니면 x는 파나마 동전이다를 “의미하는” 새로운 상태 B에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올바른” 표상)?
직관적인 답은 설계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 기술자가 미국 동전을 식별할 의도로 자판기를 설계하여 미국에 설치했다면, 기계는 상태 Q에 들어가며, 파나마 동전이 투입되면 잘못된 표상이 발생한다. 설계자가 파나마인이었다면 그 반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기계의 지향성은 설계자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는 자판기가 단순한 인공물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논쟁은 인간에게도 동일한 것이 참인지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존스가 말을 보고 “말”이라고 말할 때, 그는 x는 말이다를 의미하는 상태 H에 있다고 여겨진다. 어느 날 존스가 말과 닮았지만 분류학적으로는 말이 아닌 생물인 슈모스schmorse와 마주친다. 이 만남이 존스로 하여금 상태 H에 들어가게 하는가, 아니면 x는 슈모스다를 의미하는 새로운 상태 SH에 들어가게 하는가? 아니면 존스에게 줄곧 해당했던 것은 상태 H가 아니라 x는 말이거나 슈모스거나 …를 의미하는 상태 H*였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데넷은 전선을 그어놓는다:
그가 정확히 어떤 상태에 있는지 결정하기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는 실제로 둘 중 하나의 상태에 있다… 이 직관을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초적 지향성을 믿는 것이며, 훌륭한 동료들이 있다: 포더, 설, 드레츠케, 버지, 크립키… 이 직관을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완전히 기각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나, 처칠랜드 부부, 데이비슨, 하우겔란드, 밀리컨, 로티, 스탈네이커, 그리고 우리의 뛰어난 선배들인 콰인과 셀라스와 함께 다른 편에 설 수 있다.
데넷은 개인에 관한 어떤 사실로도 그의 정신 상태에 관한 불확정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확정성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은 우리의 지향성이 자판기의 것만큼 파생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만 설계자가 인간이 아니라 “대자연”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개구리가 파리로 착각하여 납 구슬을 “잘못” 낚아채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실수”일까? 답은 개구리의 신경생리학이 아닌 개구리로 하여금 물건을 낚아채게 한 자연선택적 진화사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면 개구리의 낚아채기가 영양분을 얻는 기능을 위해 “선택되었음”이 분명해지므로, 개구리가 납 구슬을 낚아채는 것은 실수다. 따라서 자판기와 마찬가지로 개구리의 지향성은 설계자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차이점은, 설계자가 “대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가 파생된 지향성을 갖는다면, 우리를 포함한 더 복잡한 유기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더(1996)를 따라, 데넷의 입장을 세 부분으로 더 정확히 ‘해체’할 수 있다: (1) 적응주의adaptationism가 자연선택의 참된 설명이고, (2) 적응주의가 자연주의적 목적론natural teleology—자연이 어떤 목적을 “위해” 기관을 “선택한다”고 말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고, (3) 자연주의적 목적론이 지향성을 정당화한다. 이 글에서는 (1)과 (2)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예컨대 혈액을 순환시키는 심장과 맥박 소리를 내는 심장이 동연co-extensional이라는 것은 법칙적 필연nomologically necessity로 보이지만, 심장은 맥박 소리를 내는 능력이 아니라 혈액을 펌프질하는 능력을 “위해 선택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이 글의 관심사는 자연주의적 목적론이 지향성을 기초짓기에 충분한지 여부다.
데넷이 불확정성 문제를 원초적 지향성을 의심하는 주요 이유로 인용하므로, 문제의 정확한 구조를 다음과 같이 명료화하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데넷은 앞서 언급한 말-슈모스 사례뿐만 아니라 퍼트남의 H₂O-XYZ 사례, 그리고 자신의 glug 사례(데넷 1981)를 포함하여 (3.1)에 대한 다양한 반례를 인용한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 진술한 불확정성 문제가 잘못 설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지향적 실재론이 참이더라도 (3a)에 대한 반례는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1.1), (1.2), (1.3)을 인정하고, 존스가 “의자”라고 말할 때 그는 x는 의자다라는 내용을 가진 표상적 정신 상태에 있다고 하자. $s_1$은 의자이고 $s_n$은 톱밥 더미인 소라이츠 열Sorites sequence $(s_1, \dots, s_n)$을 고려해보자. (3.1)은 존스가 “의자”라고 말할 때 $1 ≤ i ≤ n$에 대해 $s_i$를 올바르게 표상하는지에 관한 원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없으므로 (3.1)은 반박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향적 실재론에 대한 유효한 논증이 될 수 없다. 기껏해야 “의자”와 연관된 내용의 모호성vagueness을 드러낼 뿐이다. 문제는 (1.1), (1.2), (1.3)이 아니라1, (1.2)로부터 (2.1)을 연역하는 데 있다. 표상은 어떤 세계들이 올바른지에 대한 미리 결정된 기준 없이도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표상할 수 있다. 결론은 의미가 불확정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확정적인 의미가 모호한 외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2
그렇긴 하지만, 이 점이 데넷의 예시들에 어느 정도까지 적용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반쯤 부서진 의자들에 대해 “의자”라고 말하는 것의 모호성이 슈모스들에 대해 “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생물학적 종에 대한 반실재론자들은 그렇게 보려 할 것이지만, 본질주의자들은 둘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 절박한 시도라고 논증할 것이다.3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할 수도 있지만, 이는 의도치 않은 형이상학적 굴레로 빠지는 일이다.
따라서 나의 제안은 데넷의 불확정성 예시들이 실제로 지향적 실재론을 위협하는지의 문제를 제쳐두는 것이다. 불확정성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물리적 대상들—”자연종” 후보들—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고, 대신 만약 의미가 존재한다면 결코 그 의미가 모호할 수 없는 언어들로 문제를 제한하는 것이 더 나은 진행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논리로 초점을 이동하게 한다.
크립키(1982)의 유명한 회의적 역설은 50보다 높은 수를 더해본 적이 없는 화자가 ‘+’로 덧셈을 의미했는지, 아니면 컷셈quaddition(아래에 정의됨)을 의미했는지에 관한 사실이 있는지 묻는다.
\[x \oplus y = \begin{cases}x + y & (x, y < 50) \\5 & \text{(otherwise)}\end{cases}\]곧 드러날 이유 때문에, 나는 크립키의 사례를 약간 변형하여 산술 대신 논리에 적용할 것이다. 함의 기호 ‘→’를 고려해보자.4 캄의quimplication를 50개 미만의 토큰을 가진 문장에 나타나면 함의와 일치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을 도출하는 연산이라고 하자. 예를 들어, $p \to p$는 참이지만, $(p_1 \land p_2 \land \dots \land p_{50}) \to p_1$은 거짓이다.
앨리스가 평생에 걸쳐 50개보다 많은 토큰을 가진 문장을 단 한 번만 다루었다고 가정하자(더 극적인 시나리오를 위해 그녀가 죽어서 그녀의 언어 사용에 관한 추가 데이터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해당 문장 φ는 참이었지만 앨리스는 그것을 거짓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가 캄의를 나타냈다면 그 문장은 실제로 거짓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말-슈모스 사례와 유사한 불확정성에 직면한다. 앨리스가 ‘→’로 함의를 의미했지만 실수를 한 것일까, 아니면 앨리스가 ‘→’로 캄의를 의미한 것일까?
나는 ‘→’에 대한 사례가 지향성을 논의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불확정성을 내용의 모호성 탓으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5 그러므로 지향성의 불확정성 문제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자. 우리가 “함의한다”와 같은 논리적 어휘를 사용할 때, 우리는 확정적인 의미를 가진 정신 상태에 있는가? 이제 데넷주의자가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지 개괄하고, 그런 응답들이 순환논리에 빠진다고 논증할 것이다. 따라서 원초적 지향성 논제는 적어도 우리의 논리 사용에 대해서는 참이어야 한다.
추정컨대 데넷주의자는 “앨리스가 ‘→’로 함의를 의미한다”와 “앨리스가 ‘→’로 캄의를 의미한다”는 진술 모두가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 둘 다 데넷(1991)에서 제시된 “실재 패턴real patterns“의 기준을 만족한다. 둘 다 앨리스의 ‘→’ 사용을 그녀의 행동에서의 패턴으로 기술하며, “앨리스가 ‘A’와 ‘A → B’를 승인할 때, 그녀는 ‘B’를 승인하는 성향이 있다”와 같은 진술들로 구성된다. 차이점은 후자가 ‘A → B’의 토큰 수가 50개 미만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패턴 모두 실재적이다. 존스가 첫 번째 패턴을, 브라운이 두 번째 패턴을 사용하여 앨리스의 미래 ‘→’ 사용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내기를 했다면, “둘 다 부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실재적이다.
그러나 더 야심찬 데넷주의자는 불확정성에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자연주의적 목적론을 통해 ‘캄의’보다 ‘함의’ 해석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앞서 자연주의적 목적론이 개구리가 납 구슬을 낚아채는 것을 실수라고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개구리의 물건을 낚아채는 능력이 영양분을 얻는 기능을 위해 “선택되었기selected for” 때문이다. 데넷주의자는 논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증할 수 있다: 논리로 추론하는 우리의 능력은 참인 전제들로부터 참인 문장들을 연역하는 기능을 위해 “선택되었다”. 거짓보다 참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를 캄의로 하는 연역은 모순적이므로 앨리스는 ‘→’로 함의를 의미했고, φ를 참이라고 연역한 것은 실수였다는 결론이 따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시도가 참truth 개념에 호소한다는 이유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타르스키의 작업으로부터 나온 잘 받아들여지는 교훈은 참의 개념이 언어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데넷주의자가 앨리스가 참인 문장들을 아는 것이 앨리스에게 유익하다고 주장할 때, 여기서 “참”은 실제로 “$L_A$에서-참”을 의미한다 ($L_A$는 앨리스의 언어를 나타낸다). 중요하게도, 솜즈(1984)는 언어의 범위가 논리적 어휘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타르스키적 참 정의의 조항들은, ($T_A$는 “$L_A$에서-참”을 나타낸다)
(1) $T_A(\ulcorner \phi \;\dot{\to}\; \psi \urcorner)$ iff $T_A(\ulcorner \phi \urcorner)$가 $T_A(\ulcorner \psi \urcorner)$를 함의한다 6
‘→’가 앨리스의 언어에서 함의를 의미한다고 전제한다. 이 전제 없이는 참의 정의가 시작조차 될 수 없다. 솜즈는 이 점을 사용하여 필드(1972)가 구상한 참의 물리주의적 환원에 대해 논증하지만, 우리는 그의 점을 사용하여 논리에 대한 자연-목적론적 설명에 대한 공격을 전개할 수도 있다. 자연-목적론적 설명은 참, 구체적으로 “$L_A$에서-참”의 효용에 호소하여 앨리스가 사용하는 논리적 어휘의 (파생된) 의미들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그러나 “$L_A$에서-참”의 바로 그 정의가 해당 의미에 의존하므로, 순환논리에 빠진다.
그러나 데넷주의자들은 어떤 참 개념에 호소해야 한다. 특정 부류의 문장들과 연역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진화적으로 유익”할 수 있는 이유로서 참의 효용utility of truth 말고는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7 데넷주의자들이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L_A$에서-참”을 앨리스가 믿었을 때 그녀에게 유용할 문장들의 부류로 단순히 정의하는 것이다. 이는 실용주의적 진리론을 채택하는 것이고, 참이 진화적으로 유익하다는 주장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함의가 캄의보다 더 진리-보존적(즉 효용-보존적)인 이유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함의가 실제로 캄의보다 더 진리-보존적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물론 실용주의 이론을 학계에서 사장되게 만든 더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
데넷주의자들이 수축주의deflationism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참에 대한 실질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을 단순히 우회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역시, 판단은 수축주의가 참의 효용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버지스(2011)는 그러한 설명의 개략을 제시한다. 믿음이 그 믿음을 갖는 것이 의지력이 약하지 않은 한 행위자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한다면 직접적으로 행동-안내적directly action-guiding이라고 하자. 예를 들어:
(2) 지금 헬스장에 가는 것은 가장 선호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믿음이 행위자의 가장 선호하는 결과를 얻는 데 유용하다면 유용하다고 하자. (2)가 유용한 믿음이라는 것이 동어반복적으로 따라온다. 만약 지금 헬스장에 가는 것이 가장 선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이는 수축주의적 진리관에서 (2)가 참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치다. 따라서 수축주의자들은 적어도 직접적으로 행동-안내적인 믿음들에 대해서는 참의 효용을 설명할 수 있다.
버지스는 이 접근법을 일반적인 경우로 확장한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직접적으로 행동-안내적인 믿음들이 일반적으로 다른 믿음들을 전제로 삼아 어떤 방식으로 결론으로 추론될 것이므로, 관련된 다른 믿음들이 참이고 전제들로부터 결론들을 추론하는 방식이 진리-보존적이라면 간접적으로 유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3) 만약 내가 오늘 급한 마감일이 없다면, 지금 헬스장에 가는 것은 가장 선호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4) 나는 오늘 급한 마감일이 없다.
(3)과 (4)는 (2)를 연역하므로, 다음이 따른다:
이 그림이 수축주의자에게는 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데넷주의자들에게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그림이 다시 한번 타르스키적 접근법에 암묵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앨리스가 발화한 (3)의 참—구체적으로 “$L_A$에서-참”—이 (a)와 동치라고 주장할 때, 앨리스가 ‘…라면’으로 함의를 의미하고 어떤 기괴한 캄의와 같은 조작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전제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참의 효용에 호소하여 행위자가 논리적 어휘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하는 모든 자연-목적론적 이야기는 타르스키적 기초를 통해 해당 의미들에 관한 사전 사실들을 전제하므로 순환논리에 빠진다. 따라서 데넷주의자들이 자연주의적 목적론에 호소하여 지향성과 정확성의 어떤 개념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논리는 그 중 하나가 될 수 없다.
데넷주의자들에게 남은 선택은 앨리스의 논리적 어휘 해석에서의 불확정성을 그 완전한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될 것이므로, 논리 일반은 절대적이지도 규범적이지도 않고, 단지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는 사고에서의 패턴들에 관한 기술들의 한 집합일 뿐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그러나 19-20세기 독일어권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특징지어진 잘 발달된 사고의 흐름은 논리에 대한 그러한 관점이 비정합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흐름은 당시 유행했던 심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전되었다. 심리주의는 심리학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경험과학이고, 논리가 사고의 규칙성에 관한 것이므로, 논리가 심리학에 포섭된다고 주장한다.
데넷의 관점을 “심리학”을 신경생리학과 행동주의를 포함하도록 해석한 심리주의와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이런 비난 자체는 부당할 것이다. 데넷이 어떤 의미에서의 규범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자연주의적 목적론 접근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접근이 논리에 대해서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았으므로, 데넷주의적 관점은 실제로 완전한 심리주의에 연루되어 있고, 심리주의에 대해 제기된 어려움들에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을 조사하는 대신, 심리주의의 어려움들이 어떻게든 극복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데넷주의적 관점과 관련하여 일관성이 있을 수 없다는 추가적인 이유들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이 글에서는 더 적절할 것이다. 데넷주의적 관점에 독특한 것은 정신적 내용들에 대한 제거주의와 실재론 사이의 중간 입장을 유지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넷은 민간심리학의 힘을 인정하고 의미나 믿음의 귀속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제거주의와 거리를 두는 한편, 한 사람이 참으로 의미하거나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실재적 답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실재론과도 거리를 둔다. 따라서 그는 “한 개인에 대한 두 [불일치하는] 믿음 귀속 체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가 그 개인의 실제 믿음들에 대한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립할 수 있는 더 깊은 사실은 없다”(데넷 1991)와 같은 주장들을 하게 된다.
프레게(1884)는 불일치라는 개념이 공통된 논리적 틀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유명하게 제기한다. 프레게의 지적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존스와 브라운이 앨리스에게 논리에 관한 두 가지 다른 믿음 체계를 귀속시키는 시나리오를 고려해보자. 존스는 “‘p’와 ‘p → q’로부터 ‘q’를 연역해야 한다”와 같은 표준적인 믿음들을 귀속시키는 반면, 브라운은 앨리스의 행동을 똑같이 잘 설명하는 비표준적 믿음들을 귀속시킨다. 프레게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브라운과 존스가 귀속시키는 체계들이 진정으로 다르다는 것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 어쩌면 브라운과 존스가 “$L_A$에서-참”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귀속이 다르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존스가 “함의”로 팜의를 의미하여, 두 귀속을 동치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존스의 언어 $L_J$에서 “$L_J$에서-참”를 $T_J$라고 쓰면,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이런 무한소급을 피하려면, 공통의 논리적 틀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브라운과 존스가 둘 다 “함의한다”로 함의를 의미한다는 것이 단순히 주어져야만 우리가 그들이 앨리스에게 논리에 관한 서로 다른 믿음 체계들을 귀속시킨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논의를 촉발시킨 회의주의, 즉 원초적 지향성 논제에 대한 회의주의를 반박한다.
결론적으로, 데넷주의적 관점은 논리에 적용될 때 딜레마에 직면한다. 자연-목적론적 설명은 참의 효용에 호소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불확정성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논리적 어휘로 의미하는 것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주어지지 않는 한, 서로 다른 믿음 귀속들이 있다는 것이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강요되는 결론은 우리의 정신 상태들이 논리적 어휘에 대해 확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윈의 위험한 아이디어(1994)에서 데넷은 지향성이 “갈고리skyhook“—즉, 원초적 지향성 논제—에 의존하지 않고 “기중기crane“—자연적 목적론—에 의해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자신의 기획을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이 크레인들이 애초에 설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기반”을 간과한다고 논증했다. 그 기반은 논리다.
독자들은 이것이 논리와 관련하여 우리를 어떤 입장에 위치시키는지 궁금해할 수 있다. 더 강한 이론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지향성을 설명해낸다면 어떨까? 그 질문을 추구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나의 목표는 더 겸손했다: 논리에 대한 자연-목적론적 설명들의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단순히 내가 칸트, 프레게, 비트겐슈타인, 퍼트남에서 발견되는 사고의 흐름—즉, 논리는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설명 행위에서 전제되는 것이라는 사고(퍼트남 2000; 코난트 1992도 참조)—에 호의적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글을 마친다.
(1.3)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 즉 정신 상태에 내용을 귀속시키는 데 불확정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정신 상태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고)은 선험적 참인 것으로 보인다. 내용이야말로 정신 상태의 본질적 속성이고, 따라서 정신 상태를 엄격하게 지시하는 기초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문제를 더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일부에서는 “자연종”이 범주적으로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부드러운 전이는 있을 수 없다(엘리스 2001). 이 가정 하에서 자연종에 제한된 불확정성 문제들은 (1a)로부터 (2a)를 연역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1a)로부터 (2a)를 추론하는 데 필요한 전제가 존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내용이 모호한 후보가 없다는 것이므로 여전히 어려움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존스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일부 후보들이 자연종에 해당한다는 진술보다 훨씬 강하다. ↩
도움이 된다면 그러한 의미를 상위평가주의적 진리값을 허용하는 결정 트리로 생각해도 좋다. 의미—결정 트리—는 매우 확정적이다. 단지 그 노드들 중 일부에서 불분명한 값들을 갖는 것뿐이다. ↩
편의상 형식논리의 기호들을 설명에 사용하고 있지만, 기호들은 자연언어를 포함하도록 넓게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는 ‘함의한다’와 ‘만약’도 나타내고, $p \to q$는 “만약 p이면 q다”라는 영어 문장도 나타낸다. 이런 이유로 “논리적 기호들” 대신 “논리적 어휘”라는 구를 사용할 것이다. ↩
이 점은 크립키도 강조한다: “요점은… 내 머릿속의 어떤 것도 ‘plus’(내가 사용하는)가 지시하는 함수가 무엇인지 미결정된 상태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회의적 문제는 덧셈 개념의 모호성을 (녹색 개념에 모호성이 있는 방식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회의적 요점은 다른 것이다.” ↩
점은 목표 언어의 논리적 기호들을 메타언어의 것들과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여기서 $\dot{\to}$는 앨리스가 사용하는 ‘만약’을 나타낸다. ↩
데넷(1991)도 이 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대응론적 진리론의 무용성을… 본 사람도 자연주의적 존재론적 태도 내에서 우리가 때때로 대응에 의해 성공을 설명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메인 해안에서 항해할 때 캔자스 도로 지도를 사용할 때보다 최신 해도를 사용할 때 더 잘한다. 왜인가? 전자는 메인 해안의 위험요소, 표지, 수심, 해안선을 정확하게 표상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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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essay examines Dennett’s skepticism about original intentionality and his attempt to ground meaning in natural selection and natural teleology. I argue, first, that the indeterminacy problem on which Dennett’s skepticism relies does not in itself undermine original intentionality; and second, that the natural-teleological account of logic is question-begging due to its appeal to the utility of truth. I conclude that our use of logic demonstrates a domain in which the doctrine of original intentionality must be presupposed.
In his 1981 essay, Dennett observes a major disagreement in discussions surrounding the intentionality of the mind. The disagreement is about the doctrine of original intentionality. Dennett puts it as follows:
The doctrine of original intentionality is the claim that whereas some of our artifacts may have intentionality derived from us, we have original (or intrinsic) intentionality, utterly underived.
Dennett illustrates it with the following example. Consider a vending machine, call it “two-bitser”, that accepts U.S. quarters. Allowing ourselves some metaphorical use of language, say that when a two-bitser accepts a quarter, the machine goes into a state Q which “means” x is a quarter. Interestingly, vending machines cannot tell Panamanian balboas and U.S. quarters apart. When a two-bitser accepts a balboa, then, should we say that the machine goes into state Q (hence a “misrepresentation”), or does it go into a new state B which “means” x is a balboa (hence a “correct representation”)?
A straightforward answer is that it depends on the intention of the designer. If an American mechanic designed the two-bitser with the intention of detecting U.S. quarters and installed it in the U.S., the machine goes into state Q, and a balboa fed to the machine triggers a misrepresentation. Had the designer been Panamanian, the opposite would have been the case. Hence the machine’s intentionality is derived from that of the designer.
This much is uncontroversial, since a two-bitser is just an artifact. The debate concerns whether the same is true of humans. It is held prima facie that when Jones sees a horse and utters “horse”, he is in a state H, meaning x is a horse. One day, Jones is confronted with a schmorse, a creature that resembles a horse yet is taxonomically not a horse. Does this encounter cause Jones to be in state H, or does it cause Jones to be in a new state SH meaning x is a schmorse? Or could it have been that it was not state H, but rather state H*, meaning x is a horse or a schmorse or … that Jones has been in all along?
Here is where Dennett draws the battle line:
However hard it may be to determine exactly which state he is in, he is really in one or the other… Anyone who finds this intuition irresistible believes in original intentionality, and has some distinguished company: Fodor, Searle, Dretske, Burge, and Kripke… Anyone who finds this intuition dubious if not downright dismissible can join me, the Churchlands, Davidson, Haugeland, Millikan, Rorty, Stalnaker, and our distinguished predecessors, Quine and Sellars, in the other corner.
Dennett claims that no fact about the individual can solve the indeterminacy problem regarding their mental states. What is needed to resolve the indeterminacy is to recognize that our intentionality is just as derived as that of a two-bitser, except that the designer is not human, but “Mother Nature”. To illustrate, it is well-known that frogs “mistakenly” snap at lead pellets for flies. But why is it a “mistake”? The answer is not in the frog’s neurophysiology, but in the evolutionary history guided by natural selection that led frogs to snap at things. It then becomes evident that the frog’s snapping has been “selected for” its function to obtain nutrients, so a frog snapping at a lead pellet is a mistake. Thus, just like a two-bitser, the intentionality of a frog is derived from its designer; the designer being “Mother Nature”. And if frogs have derived intentionality, the same would be true for more complex organisms too, including ourselves.
Following Fodor 1996, we can more precisely ‘deconstruct’ Dennett’s position as composed of three parts: (1) adaptationism is the true account of natural selection, (2) adaptationism grounds natural teleology — the way of saying that nature “selects” an organ “for” a purpose —, and (3) natural teleology grounds intentionality. In this essay I will begin by simply accepting (1) and (2). So for example, I accept that although it is presumably a nomological necessity that hearts which pump blood are coextensional with hearts which make noise, it is true that hearts have been “selected for” their blood-pumping capability and not for their noise-making capability. The concern of this essay is whether natural teleology is sufficient to ground intentionality.
Since Dennett cites the indeterminacy problem as a major reason to doubt original intentionality, it will aid our discussion to elucidate the exact structure of the problem as follows.
Dennett cites various counterexamples to (3.1), including the aforementioned horse-schmorse case, but also Putnam’s H₂O-XYZ case, and his own glug case (Dennett 1981). However, I argue that the indeterminacy problem as stated above is misformulated, since counterexamples to (3a) will always exist even if intentional realism were true. Granting (1.1), (1.2), and (1.3), say that when Jones utters “chair”, he is in a representational mental state whose content is x is a chair. Consider a Sorites sequence $(s_1, \dots, s_n)$ where $s_1$ is a chair and $s_n$ is a pile of sawdust. (3.1) demands there be a principled criterion as to whether Jones correctly represents $s_i$ for $1 ≤ i ≤ n$ when he utters “chair”. But there isn’t an answer to be found, hence (3.1) is falsified.
Yet this cannot be a valid argument against intentional realism. At most, it reveals the vagueness of content associated with “chair”. The culprit is neither (1.1), (1.2), nor (1.3) 1, but in deducing (2.1) from (1.2). A content can represent the world as being a certain way without a predetermined criterion as to which worlds are correct. The conclusion to be drawn is not that the meaning is indeterminate, but that a determinate meaning could have a vague extension.2
That said, the extent to which this point applies to Dennett’s examples is not straightforward. Can the vagueness concerning one’s uttering of “chair” to half-broken chairs be identified with that of “horse” to schmorses? Irrealists about biological species may be inclined to view so, while essentialists will argue that it is a desperate move to put the two on the same line.3 We could decide to go on and try to settle this issue, but this would be to laden the discussion with undesirable metaphysical baggage.
My suggestion therefore is that we set aside the question of whether Dennett’s examples of indeterminacy genuinely threaten intentional realism. I find that a better way to proceed is to dispense with using physical objects — “natural kind” candidates — to pose the indeterminacy problem, and instead to restrict the problem to languages whose meaning, if they exist, cannot possibly be vague. This leads us to shift the focus to logic.
A famous skeptical paradox from Kripke 1982 asks whether there is a fact as to whether a speaker, who has never added numbers higher than 50, meant addition, or quaddition (defined below), with ‘+’.
\[x \oplus y = \begin{cases}x + y & (x, y < 50) \\5 & \text{(otherwise)}\end{cases}\]For reasons to come, I will operate with a slight variation of Kripke’s case, applied to logic instead of arithmetic. Consider the material implication symbol ‘→’. 4 Let quimplication be the operation that coincides with implication if it appears in a sentence with less than 50 tokens, and evaluates to false otherwise. For example, $p \to p$ is true, but $(p_1 \land p_2 \land \dots \land p_{50}) \to p_1$ is false.
Suppose that Alice has, in her whole lifetime, dealt with sentences of more than 50 tokens only once (for a more dramatic scenario we may consider her dead, so that no further data about her use of language is obtainable). Let us further assume that the said sentence, say φ, was true, but Alice had evaluated it to be false. It turns out that the sentence would have indeed been false, had ‘→’ been taken to stand for quimplication. We are now faced with an indeterminacy akin to the horse-schmorse case. Did Alice mean implication with ‘→’ but had made a mistake, or did Alice mean quimplication with ‘→’?
I claim that the case for ‘→’ is better suited for discussing intentionality, for now the indeterminacy cannot be imputed to the vagueness of content.5 So let us recast the indeterminacy problem of intentionality as follows. When we use logical vocabulary such as “implies”, are we in mental states with determinate meanings? I will now outline how a Dennettian might respond to this question, and then argue that the responses are question-begging. Hence the doctrine of original intentionality must hold true at least for our use of logic.
Presumably, a Dennettian would hold the statement “Alice means implication with ‘→’” and “Alice means quimplication with ‘→’” to be both justified. Indeed they both satisfy the criteria for “real patterns” laid out in Dennett 1991. Both describe Alice’s use of ‘→’ as a pattern in her behavior, consisting of statements such as “when Alice approves ‘A’ and ‘A → B’, she is disposed to approve ‘B’”; the difference is that the latter requires the number of tokens in ‘A → B’ to be less than 50. This difference notwithstanding, the two patterns are both real, in the sense that had Jones used the first pattern and Brown the second to predict Alice’s future uses of ‘→’ and bet accordingly, “they will both get rich”.
But a more ambitious Dennettian may not succumb to the indeterminacy so easily. Instead, she could attempt to justify the implication interpretation over quimplication through natural teleology. Previously we have seen how natural teleology paves the way to say that a frog snapping at a lead pellet is a mistake, because the frog’s ability to snap at things had been “selected for” its function to obtain nutrients. A Dennettian could argue likewise for logic: our ability to reason with logic had been “selected for” its function to deduce true sentences from true premises, because knowing more truths than falsities is evolutionarily beneficial. It then follows that since deductions with ‘→’ as quimplication are vastly inconsistent, Alice meant implication with ‘→’, and her deducing φ to be true was a mistake.
However, I argue that this line of response has issues, due to its appeal to the notion of truth. It is a well-received moral from the works of Tarski that the notion of truth is relative to language. Hence, when a Dennettian claims that Alice’s knowing true sentences is beneficial to Alice, the “true” here really means “true-in-$L_A$”, where $L_A$ stands for Alice’s language. Importantly, Soames (1984) points out that the scope of language encompasses the logical vocabulary. Hence, the clauses for Tarskian truth definition, such as
(1) $T_A(\ulcorner \phi \;\dot{\to}\; \psi \urcorner)$ if and only if $T_A(\ulcorner \phi \urcorner)$ implies $T_A(\ulcorner \psi \urcorner)$ 6
where $T_A$ stands for “truth-in-$L_A$” presumes that ‘→’ means implication in Alice’s language. Without this premise, the definition of truth cannot even get off the ground. Soames uses this point to argue against a physicalist reduction of truth envisioned by Field 1972, but we can also use his point to deliver an attack against the natural-teleological explanation for logic. The natural-teleological explanation appeals to the utility of truth, specifically “truth-in-$L_A$”, to decide what the (derived) meanings of the logical vocabulary as used by Alice are. However, the very definition of “truth-in-$L_A$” is dependent on the said meaning, thus begging the question.
Yet Dennettians need to appeal to some notion of truth, for it is the utility of truth, if anything, that endows a certain class of sentences and deductions to be more “evolutionarily beneficial” than others.7 That said, one possible move for Dennettians is to simply define “truth-in-$L_A$” as the class of sentences that, were Alice to believe them, would be useful to her. This would be to adopt the pragmatist theory of truth, and the claim that truth is evolutionarily beneficial would follow tout court. However, not only would it then be utterly unclear as to why implication is more truth-preserving (i.e. utility-preserving) than quimplication, it is even unclear if implication really is more truth-preserving than quimplication — not to mention the more serious problems of the pragmatist theory that made it fall out of fashion.
Can Dennettians choose to simply bypass giving a substantial account of truth by adopting a deflationist view? Again, the verdict lies on whether deflationism can explain the utility of truth. Burgess & Burgess (2011) gives a sketch of such an explanation. Call a belief directly action-guiding if having that belief leads the agent to do a certain action unless the agent is weak-willed, e.g.
(2) Going to the gym now will lead to the outcome most preferred.
Say a belief is useful if it is useful in obtaining the agent’s most preferred outcome. It follows tautologically that (2) is a useful belief, if, going to the gym now will lead to the outcome most preferred, which in the deflationist view of truth is equivalent to saying that (2) is true. So deflationists can explain the utility of truth, at least for directly action-guiding beliefs.
Burgess then extends this approach to the general case. The picture is that “since directly action-guiding beliefs will generally be inferred as conclusions in some manner from other beliefs taken as premises, it will be indirectly useful if the other beliefs involved are true and the manner of inferring conclusions from premises involved is truth-preserving”. The picture may be more fully articulated as follows. Since
(3) If I don’t have any urgent deadlines today, then going to the gym now will lead to the outcome most preferred.
(4) I don’t have any urgent deadlines today.
together deduce (2), it follows that:
Although this picture may be satisfactory for deflationism per se, it poses problems for Dennettians, because this picture once again tacitly depends on the Tarskian approach to truth. Namely, in claiming that the truth — specifically, “truth-in-$L_A$” — of (3), as uttered by Alice, is equivalent to (a), it is presumed that Alice means if with ‘if’, and not some bizarre quimplication-like operation.
In conclusion, any natural-teleological story that appeals to the utility of truth to decide what an agent means with their logical vocabulary presupposes, via its Tarskian underpinnings, prior facts about the said meanings, begging the question. Hence, even if Dennettians could explain some notion of intentionality and correctness by appealing to natural teleology, logic cannot be one of them.
The remaining choice for Dennettians is to embrace the indeterminacy in interpreting Alice’s logical vocabulary in its fullest sense. Since this would equally apply to everyone else, it follows that logic as a whole is neither absolute nor normative, but rather is just one set of descriptions about patterns in thinking to which humans in general tend to conform.
However, a well-developed line of thought, prominently featured in 19-20th century German-speaking world, asserts that such a view of logic is non sequitur. The line was developed as a reaction against then-fashionable psychologism, which holds that since psychology is the empirical science that explains why people think so-and-so, and logic is about regularities in thoughts, it follows that logic is subsumed under psychology.
Although it is tempting to identify Dennett’s view with psychologism, with “psychology” construed to include neurophysiology and behaviorism, this accusation in itself would have been unjust, for Dennett is also equipped with the natural teleology story that could have secured some sense of normativity or correctness. However, now that we have seen that this story is ineffective for logic, it seems that the Dennettian view really is implicated to a full-fledged psychologism, and is prone to the difficulties raised against it.
But instead of investigating these difficulties, which others have done and continue to do so to great extent (see Kusch 2024), it would be more appropriate in this essay to point out that even if the difficulties of psychologism could somehow be overcome, there are further reasons to doubt that it could be consistent vis-à-vis the Dennettian view. For, what is unique to the Dennettian view is that it tries to stay as an intermediate position between eliminativism and realism about mental contents. Dennett distances from eliminativism by appreciating the power of folk-psychology and holding that attributions of meanings or beliefs are justified, while also distancing from realism by claiming that there is no real answer as to what one truly means or believes. Thus he is led to claims such as “there could be two [disagreeing] systems of belief attribution to an individual… and yet where no deeper fact of the matter could establish that one was a description of the individual’s real beliefs and the other not.” (Dennett 1991)
Frege 1884 famously raises the point that the notion of disagreement only makes sense against a common framework of logic. To illustrate how Frege’s point is relevant, consider a scenario where Jones and Brown attribute to Alice two different systems of belief about logic. Jones attributes the standard beliefs such as “From ‘p’ and ‘p → q’ one ought to deduce ‘q’”, while Brown attributes bizarre beliefs that nonetheless explain Alice’s behavior equally well. Frege would ask: how can it be substantiated that the systems attributed by Brown and Jones are truly different? Perhaps Brown and Jones write out what they take “truth-in-$L_A$” to be as follows.
However, this falls short of showing conclusively that their attributions are different, since it could be that Jones happens to mean skimplication with “implies”, rendering the two attributions equivalent. That is, writing $T_J$ for “truth-in-$L_J$” where $L_J$ stands for Jones’ language, it could turn out that:
To escape from such regress, a shared framework of logic must be firmly in place. Only when it is given simpliciter that Brown and Jones both mean implication with “implies” can we legitimately say that they attribute to Alice different systems of belief about logic. But then the simpliciter phrase refutes the very skepticism that sparked this discussion, namely, skepticism about the doctrine of original intentionality.
In conclusion, the Dennettian view, when subjected to logic, faces a dilemma. It cannot furnish a natural-teleological explanation, for the explanation appeals to the utility of truth. Yet it cannot simply embrace the indeterminacy, for that would make it unintelligible that there be differing attributions of beliefs, unless it is given simpliciter that what we mean with our logical vocabulary is firmly in place. In either case the conclusion forced upon is that our mental states do have definite meaning for the logical vocabulary.
In Darwin’s Dangerous Idea (1994), Dennett elaborates his project to show that intentionality can be explained entirely by “cranes” — the mindless process of natural selection — without reliance on “skyhooks,” namely, the doctrine of original intentionality. I have argued, however, that this picture overlooks the very “bedrock” that enables cranes to stand in the first place, the bedrock being logic.
I anticipate that the readers may wonder where this leaves us with respect to logic. One might wonder whether a stronger theory could ultimately explain away our most basic intentionality. Pursuing that question lies beyond the scope of this essay. My aim has been more modest: to illustrate problems in natural-teleological explanations for logic. I therefore close by aligning myself with a line of thought found in Kant, Frege, Wittgenstein, and Putnam — namely, that logic is not something that requires explanation, but is presupposed in every act of explanation (Putnam 2000; see also Conant 1992).
That (1.3) cannot be the culprit, i.e. there cannot be indeterminacy in ascription of content to mental states (granted they exist) seems to be an a priori truth, for it should be content, if anything, that is the essential property of a mental state, and hence the basis for rigidly designating mental states. ↩
To put the matter more generally, it is held by some that “natural kinds” are categorically distinct; there cannot be a smooth transition from one kind to another (Ellis 2001). Under this assumption, indeterminacy problems restricted to natural kinds may allow deducing (2a) from (1a). Though I still think there is difficulty remaining, since the premise required to infer (2a) from (1a) is that there is no candidate for Jones’ mental state whose content is vague. This is much stronger than the statement that some candidates for Jones’ mental states correspond to natural kinds. ↩
If it helps one may think of such meaning as a decision tree allowing supervaluationistic truth value. The meaning — the decision tree — is quite definite; it simply has fuzzy values in some of its nodes. ↩
Although for convenience I am using symbols of formal logic for illustration, the symbols should be broadly construed as encompassing natural language. So ‘→’ also stands for ‘implies’ and ‘if’, while $p \to q$ also stands for the English sentence “If p then q”. And for this reason, I will use the phrase “logical vocabulary” instead of “logical symbols”. ↩
This point is also emphasized by Kripke: “The point is… that anything in my head leaves it undetermined what function ‘plus’ (as I use it) denotes… The skeptical problem indicates no vagueness in the concept of addition (in the way there is vagueness in the concept of greenness)… The skeptical point is something else.” ↩
The dot serves to distinguish the logical symbols of the target language from that of the metalanguage. So here, $\dot{\to}$ stands for ‘if’, as used by Alice. ↩
Dennett (1991) also notes the point, writing that “Even someone who… has seen the futility of correspondence theories of truth must accept the fact that within the natural ontological attitude we sometimes explain success by correspondence: one does better navigating off the coast of Maine when one uses an up-to-date nautical chart than one does when one uses a road map of Kansas. Why? Because the former accurately represents the hazards, markers, depths, and coastlines of the Maine coast, and the latter does not.” ↩
이 글에서 $T$는 언어 $\mathcal{L}$의 이론이다. 또한 $x_1, \dots, x_n$을 $\vec{x}$로 쓴다.
정의. 이론 $T$가 모델 완전model complete하다는 것은 임의의 $T$의 모델 $\mathfrak{A}, \mathfrak{B}$에 대해
\[\mathfrak{A} \subseteq \mathfrak{B} \implies \mathfrak{A} \preceq \mathfrak{B}\]라는 것이다.
예시
체field 이론은 모델 완전하지 않다. 실수체 $\mathbb{R}$과 유리수체 $\mathbb{Q}$에 대해 $\mathbb{Q} \subseteq \mathbb{R}$이지만 $\exists x (x \cdot x = 2)$의 진릿값이 두 모델에서 다르므로 $\mathbb{Q} \not\preceq \mathbb{R}$이기 때문이다.
비꼬임 가분 아벨군torsion-free divisible abelian group 이론은 모델 완전하다. (증명 어려움)
양화사 제거 가능한 이론은 모델 완전하다. (증명 쉬움)
2를 비롯하여, 모델 완전성을 판별하는 데 유용한 정리 중 하나는 다음이다.
로빈슨 판별법Robinson’s Test. $T$가 모델 완전할 필요충분조건은 다음이 성립하는 것이다.
- 임의의 $T$의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가 만족하는 $\Sigma_1$ $\mathcal{L}_\mathfrak{A}$-문장은 $\mathfrak{A}$ 또한 만족한다.
다음의 보조정리를 먼저 증명한다.
보조정리. $T$가 모델 완전할 필요충분조건은 다음이 성립하는 것이다.
- 임의의 $\mathcal{L}$-명제 $\phi(\vec{x})$에 대해, $T \vDash \forall \vec{x} (\phi(\vec{x}) \leftrightarrow \psi(\vec{x}))$를 만족하는 $\Pi_1$ 명제 $\psi(\vec{x})$가 존재한다.
(이는 예시 3의 진술, 즉 양화사 제거 가능성은 모델 완전성보다 강한 조건임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보조정리의 증명. 먼저 충분조건임을 보이자. $T$의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만약 $\mathfrak{A} \not\preceq \mathfrak{B}$라면 콤팩트성 정리에 의해 어떤 $E(\mathfrak{A})$의 문장 $\phi(\vec{a})$가 존재하여 $\mathfrak{B} \not\vDash \phi(\vec{a})$이다. 가정에 의해 $T \vDash \forall \vec{x} (\phi(\vec{x}) \leftrightarrow \psi(\vec{x}))$를 만족하는 $\Pi_1$ 명제 $\psi$가 존재한다. 따라서 $\mathfrak{B} \not\Vdash \psi(\vec{a})$이다. 그런데 이는 $\Pi_1$ 문장이고, $\Pi_1$ 문장은 부분모델에 대해 보존되므로 $\mathfrak{A} \not\Vdash \psi(\vec{a})$가 되어 모순이다.
이제 필요조건임을 보이자. $\phi(\vec{x})$가 임의의 $\mathcal{L}$-명제라고 하자. 워시-타르스키 정리의 다음 일반화를 사용한다 (증명은 연습문제).
정리. $\mathcal{L}$의 이론 $T \subseteq T’$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고 하자.
- 임의의 $T$의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가 $T’$의 모델이라면 $\mathfrak{A}$도 $T’$의 모델이다.
이때, 어떤 $\Pi_1$ $\mathcal{L}$-문장들의 모임 $P$가 존재하여 $T’$은 $T \cup P$와 동치이다.
$\mathcal{L}$에 상수 $\vec{c}$를 추가한 언어를 $\mathcal{L}’$이라고 하자. $T$를 $\mathcal{L}’$-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mathcal{L}’$-이론 $T’ = T \cup { \phi(\vec{c}) }$를 생각하자.
임의의 $T$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 \vDash T’ \implies \mathfrak{A} \vDash T’$임을 보이자. $T$가 모델 완전하므로 $\mathfrak{A} \preceq \mathfrak{B}$이며, 따라서
\[\mathfrak{B} \vDash \phi(\vec{c}) \iff f $\mathfrak{A} \vDash \exists \phi(\vec{c})\]이므로
워시-타르스키 정리에 의해, 임의의 $T$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 \vDash T’ \implies \mathfrak{A} \vDash T’$임을 보이면 $T’$은 어떤 $\Pi_1$ $\mathcal{L}’$-문장들의 모임 $P$에 대해 $T \cup P$와 동치이다. 즉,
\[T \cup P \vdash \phi(\vec{c})\]증명의 유한성에 의해 $T \cup P$에서 $\phi$를 증명하는 데 필요한 $P$의 명제는 유한하다. 그 명제들의 논리곱을 $\pi(\vec{c})$라고 하면
\[T \vdash \forall x (\phi(\vec{x}) \leftrightarrow \pi(\vec{x}))\]이고 $\pi(\vec{x})$는 $\Pi_1$ $\mathcal{L}$-문장이므로 증명이 완료된다.
따라서,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 \vDash T’ \implies \mathfrak{A} \vDash T’$임을 보이자.
\[T \vDash \forall \vec{x} (\phi(\vec{x}) \leftrightarrow \psi(\vec{x}))\]이 얻어져 증명이 완료된다.
이 글에서 $T$는 언어 $\mathcal{L}$의 이론이다. 또한 $x_1, \dots, x_n$을 $\vec{x}$로 쓴다.
정의. 이론 $T$가 모델 완전model complete하다는 것은 임의의 $T$의 모델 $\mathfrak{A}, \mathfrak{B}$에 대해
\[\mathfrak{A} \subseteq \mathfrak{B} \implies \mathfrak{A} \preceq \mathfrak{B}\]라는 것이다.
예시
체field 이론은 모델 완전하지 않다. 실수체 $\mathbb{R}$과 유리수체 $\mathbb{Q}$에 대해 $\mathbb{Q} \subseteq \mathbb{R}$이지만 $\exists x (x \cdot x = 2)$의 진릿값이 두 모델에서 다르므로 $\mathbb{Q} \not\preceq \mathbb{R}$이기 때문이다.
비꼬임 가분 아벨군torsion-free divisible abelian group 이론은 모델 완전하다.
양화사 제거 가능한 이론은 모델 완전하다.
2를 비롯하여, 모델 완전성을 판별하는 데 유용한 정리 중 하나는 다음이다.
로빈슨 판별법Robinson’s Test. 다음은 동치이다.
- $T$가 모델 완전하다.
- 임의의 $T$의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가 만족하는 $\Sigma_1(\mathcal{L}_\mathfrak{A})$-문장은 $\mathfrak{A}$에서도 만족된다.
- 임의의 $\mathcal{L}$-명제 $\phi(\vec{x})$에 대해, $T \vdash \forall \vec{x} (\phi(\vec{x}) \leftrightarrow \psi(\vec{x}))$를 만족하는 $\Pi_1(\mathcal{L})$-명제 $\psi(\vec{x})$가 존재한다.
$T$가 모델 완전하므로 $\mathfrak{A} \subseteq \mathfrak{B}$라면 $\mathfrak{A} \preceq \mathfrak{B}$이다. 따라서 $\mathfrak{A}, \mathfrak{B}$는 $\mathcal{L}_\mathfrak{A}$-문장들에 대해 동치이다. □
$\phi(\vec{x})$가 $\Sigma_1(\mathcal{L})$-명제라고 하자. $\mathcal{L}$에 상수 $\vec{c}$를 추가한 언어를 $\mathcal{L}’$이라고 하자. $T$를 $\mathcal{L}’$-이론으로 생각하고, $\mathfrak{A} \subseteq \mathfrak{B}$를 $\mathcal{L}’$-구조들의 임베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mathcal{L}’$-이론 $T’ = T \cup { \phi(\vec{c}) }$를 생각하자. $\mathfrak{B}$가 $T’$의 모델이라고 하자. $\mathfrak{A}$ 또한 $T’$의 모델임을 보인다. $\mathfrak{A} \subseteq \mathfrak{B}$가 $\mathcal{L}’$-구조들의 임베딩이므로 다음이 성립함을 관찰하라.
\[\mathfrak{B} \vDash \phi(\vec{c}) \iff \exists \vec{a} \in \mathcal{L}_\mathfrak{A} \text{ where } \mathfrak{B} \vDash \phi(\vec{a})\]$\phi(\vec{a})$는 $\Sigma_1(\mathcal{L}_\mathfrak{A})$-문장이므로 가정에 의해 $\mathfrak{A}$에서도 성립한다. 따라서 $\mathfrak{A}$는 $T’$의 모델이다.
이제 워시-타르스키 정리의 다음 일반화를 사용한다 (증명은 연습문제).
정리. $\mathcal{L}’$-이론 $T \subseteq T’$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고 하자.
- 임의의 $T$의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mathfrak{B}$가 $T’$의 모델이라면 $\mathfrak{A}$도 $T’$의 모델이다.
이때, 어떤 $\Pi_1(\mathcal{L}’)$-문장들의 모임 $P$가 존재하여 $T’$은 $T \cup P$와 동치이다.
위 정리에 의해 $T’$은 어떤 $\Pi_1(\mathcal{L}’)$-문장들의 모임 $P$에 대해 $T \cup P$와 동치이다. 즉,
\[T \cup P \vdash \phi(\vec{c})\]증명의 유한성에 의해 $T \cup P$에서 $\phi$를 증명하는 데 필요한 $P$의 명제는 유한하다. 그 명제들의 논리곱을 $\pi(\vec{c})$라고 하면,
\[T \vdash \forall x (\phi(\vec{x}) \leftrightarrow \pi(\vec{x}))\]이고 $\pi(\vec{x})$는 $\Pi_1(\mathcal{L})$-명제이므로, $\phi \in \Sigma_1$일 때 증명이 완료되었다.
이제 $\phi$에 대한 구조적 귀납법으로 증명하자. $\exists \leftrightarrow \lnot\forall\lnot$이므로, $\lor, \lnot, \forall$에 대해서만 고려하면 된다. $\lor, \forall$의 경우는 자명하므로 $\lnot$의 경우를 살핀다.
어떤 $\Pi_1(\mathcal{L})$-명제 $\psi$에 대해 $T \vdash \forall \vec{x} (\phi(\vec{x}) \leftrightarrow \psi(\vec{x}))$라고 하자. 그러면 $\lnot \phi$는 $\lnot \psi$와 동치이며, 이는 $\Sigma_1(\mathcal{L})$-명제이다. 그리고 이는 앞선 논증에 의해 $\Pi_1$ 문장과 동치이다. □
$T$의 모델 $\mathfrak{A} \subseteq \mathfrak{B}$에 대해, 만약 $\mathfrak{A} \not\preceq \mathfrak{B}$라면 콤팩트성 정리에 의해 어떤 $\mathcal{L}_\mathfrak{A}$의 문장 $\phi(\vec{a})$가 존재하여 $\mathfrak{A} \not\vDash \phi(\vec{a})$이지만 $\mathfrak{B} \vDash \phi(\vec{a})$이다.
가정에 의해 $T \vdash \forall \vec{x} (\phi(\vec{x}) \leftrightarrow \psi(\vec{x}))$를 만족하는 $\Pi_1$ 명제 $\psi$가 존재한다. 따라서 $\mathfrak{B} \vDash \psi(\vec{a})$이다. 그런데 이는 $\Pi_1$ 문장이고, $\Pi_1$ 문장은 부분모델에 대해 보존되므로 $\mathfrak{A} \vDash \psi(\vec{a})$가 되어 모순이다. ■
티호노프 정리. 콤팩트 공간들의 곱공간은 콤팩트 공간이다.
굉장히 단순하고 강력한 정리이지만, Munkres 등의 학부 위상 책을 보면 증명이 상당히 복잡하다. 아예 증명을 생략하는 책도 많은 듯하다. 하지만 초필터를 이용하면 매우 간단하게 이를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소개된 개념의 자세한 설명과 증명은 Stephen Willard, General Topology 4장을 참고하라.
이전 글에서 불 대수 구조의 필터를 소개했다. 위상공간에서 $\cup$과 $\cap$을 각각 논리합과 논리곱에 대응하면 불 대수 구조가 되므로, 위상공간에서 필터를 정의할 수 있다.
정의. 위상공간 $X$에 대해, $X$ 위의 필터 $\mathcal{F}$는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X$의 부분집합들의 모임이다.
- $X \in \mathcal{F}, \varnothing \notin \mathcal{F}$
- $A, B \in \mathcal{F} \implies A \cap B \in \mathcal{F}$
- $A \in \mathcal{F}, A \subseteq B \implies B \in \mathcal{F}$
추가로 다음을 만족하면 초필터이다.
- $A \notin \mathcal{F} \implies X \setminus A \in \mathcal{F}$
위상수학에서 중요한 필터 중 하나는 근방 필터이다. 먼저 근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의. 위상공간 $X$에 대해 $N \subseteq X$가 $x \in X$의 근방neighbourhood이라는 것은, 어떤 열린집합 $U$가 존재하여 $x \in U \subseteq N$라는 것이다.
근방은 열린집합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근방이 열린집합일 경우 열린 근방이라고 한다. 이는 근방과 열린 근방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일부 교재의 관행과 대조적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표기. $x$의 근방들의 모임을 $\mathcal{N}(x)$ 또는 $\mathcal{N}_x$라고 표기한다.
$\mathcal{N}(x)$는 필터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mathcal{N}(x)$를 근방 필터라고 부른다.
정의. 위상공간 $X$의 부분집합들의 모임 $\mathcal{C}$가 다음을 만족할 때, $\mathcal{C}$를 예비 필터prefilter 또는 필터 기저filter base라고 부른다.
- $\varnothing \notin \mathcal{C}$
- $A, B \in \mathcal{C} \implies \exists C \in \mathcal{C} : C \subseteq A \cap B$
즉, 필터가 교집합에 대해 닫혀 있는 한편 예비 필터는 교집합에 대해 “약하게” 닫혀 있다. $\mathcal{C}$가 예비 필터일 때, $\mathcal{C}$로부터 다음과 같이 필터 $\mathcal{F}$를 생성generate할 수 있다.
\[\mathcal{F} = \{ F \subseteq X : C \subseteq F \text{ for some } C \in \mathcal{C} \}\]또한 사상 $f: X \to Y$와 $X$ 위의 필터 $\mathcal{F}$가 주어졌을 때, 다음 집합족은 예비 필터이다.
\[\mathcal{C} = \{ f(F) : F \in \mathcal{F} \}\]표기. $\mathcal{C}$가 생성하는 필터를 $f(\mathcal{F})$와 같이 표기한다.
$f$가 전사onto일 경우 $\mathcal{C} = f(\mathcal{F})$라서 다루기 편하다. 또한 $f$가 전사일 때 다음이 (자명하게) 성립한다.
정리. $f: X \to Y$가 전사이고 $\mathcal{F}$가 $X$ 위의 초필터일 때, $f(\mathcal{F})$는 $Y$의 초필터이다.
모든 필터는 초필터로 확장될 수 있다. 증명은 이전 글을 참고하라 (선택 공리를 사용한다).
정리. $\mathcal{F}$가 $X$ 위의 필터일 때, $X$ 위의 초필터 $\mathcal{U}$가 존재하여 $\mathcal{U} \supseteq \mathcal{F}$이다.
정의. 필터 $\mathcal{F}$가 $\mathcal{N}(x)$를 포함할 때 $\mathcal{F}$는 $x$로 수렴한다고 하며, $\mathcal{F} \to x$와 같이 적는다.
예를 들어 예비 필터 $\lbrace (0, \epsilon) : \epsilon > 0 \rbrace $로 생성되는 필터는 $0$으로 수렴한다 (이 예시는 $\mathcal{F} \to x$라고 해서 $\mathcal{F}$의 모든 원소가 $x$를 원소로 가질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
필터 수렴의 주요 성질은 다음과 같다.
정리.
- $E \subseteq X$에 대해 $x \in \overline{E}$일 필요충분조건은 어떤 필터 $\mathcal{F}$가 존재하여 $E \in \mathcal{F}$이고, $\mathcal{F} \to x$인 것이다.
- $f: X \to Y$가 연속일 필요충분조건은 임의의 필터 $\mathcal{F}$에 대해 $\mathcal{F} \to x$라면 $f(\mathcal{F}) \to f(x)$인 것이다.
이는 1차 가산 공간에서 점렬로 폐포와 연속함수를 특징지었던 것을 일반화한 것이다.
곱공간에서 필터의 수렴은 각 요소 공간에서의 수렴과 동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정리. 곱공간 $\prod_{i \in I}X_i$ 위의 필터 $\mathcal{F}$가 $x$로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각각의 $i \in I$에 대해 $\pi_i(\mathcal{F}) \to \pi_i(x)$인 것이다.
이제 티호노프 정리를 증명해 보자. 핵심은 다음의 보조정리이다.
보조정리. $X$가 콤팩트할 필요충분조건은 $X$의 모든 초필터가 수렴하는 것이다.
$(\Rightarrow)$ $\mathcal{F}$가 수렴하지 않는 $X$의 초필터라고 하자. $\mathcal{F}$가 어느 점으로도 수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임의의 $x \in X$에 대해 어떤 열린집합 $U_x$가 존재하여 $U_x \notin \mathcal{F}$라는 것이다. $\mathcal{F}$가 초필터이므로 $X \setminus U_x \in \mathcal{F}$이다. 이제 $U_x$들의 모임 $\mathcal{C} = \lbrace U_x : x \in X \rbrace $를 생각하자. $\mathcal{C}$는 $X$를 덮으며, $X$가 콤팩트하므로 유한 부분덮개 $\lbrace U_{x_1}, \dots, U_{x_n} \rbrace $을 가진다. 따라서,
\[\begin{align} &X \setminus (U_{x_1} \cup \dots \cup U_{x_n}) \\ &= (X \setminus U_{x_1}) \cap \dots \cap (X \setminus U_{x_n}) \\ &= \varnothing \end{align}\]그런데 각 $1 \leq i \leq n$에 대해 $X \setminus U_{x_i} \in \mathcal{F}$이므로, 필터의 교집합 닫힘에 의해 $\varnothing \in \mathcal{F}$가 되어 모순이다. □
$(\Leftarrow)$ $X$가 콤팩트하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X$의 열린 덮개 $\mathcal{C}$가 존재하여 $\mathcal{C}$는 유한 부분덮개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mathcal{P}$를 정의할 때,
\[\mathcal{P} = \{ X \setminus (U_1 \cup \dots \cup U_n) : U_i \in \mathcal{C} \}\]$\mathcal{P}$는 유한 교집합에 대해 닫혀 있으며 공집합을 원소로 가지지 않으므로 예비 필터이다. 이에 따라 $\mathcal{P}$는 필터로 확장될 수 있으며, 이 필터는 초필터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한 초필터를 $\mathcal{F}$라고 하자. 가정에 의해 $\mathcal{F}$는 어떤 점 $x$로 수렴한다. 즉, $\mathcal{N}(x) \subseteq \mathcal{F}$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x \in \bigcap_{F \in \mathcal{F}} \overline{F}\]그런데 이는 $\bigcap_{P \in \mathcal{P}} \overline{P} = \bigcap_{P \in \mathcal{P}} P = \varnothing$ ($\mathcal{C}$가 $X$의 덮개이므로) 에 모순된다. ■
이제 티호노프 정리는 거의 자명하게 따라 나온다.
정리. 콤팩트 공간들의 곱공간은 콤팩트 공간이다.
각각의 $i \in I$에 대해 $X_i$가 콤팩트 공간이라고 하자. $X$가 콤팩트할 필요충분조건은 임의의 $\prod_{i \in I}$ 위의 초필터 $\mathcal{F}$가 수렴하는 것이고, $\mathcal{F}$가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pi_i(\mathcal{F})$가 $X_i$에서 수렴하는 것이다. 그런데 $\pi_i$는 전사이므로 $\pi_i(\mathcal{F})$는 초필터이고, $X_i$는 콤팩트하므로 $\pi_i(\mathcal{F})$는 수렴한다. 이에 따라 $X$는 콤팩트하다. ■
티호노프 정리. 콤팩트 공간들의 곱공간은 콤팩트 공간이다.
굉장히 단순하고 강력한 정리이지만, Munkres 등의 학부 위상 책을 보면 증명이 상당히 복잡하다. 아예 증명을 생략하는 책도 많은 듯하다. 하지만 초필터를 이용하면 매우 간단하게 이를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소개된 개념의 자세한 설명과 증명은 Stephen Willard, General Topology 4장을 참고하라.
이전 글에서 불 대수 구조의 필터를 소개했다. 위상공간에서 $\cup$과 $\cap$을 각각 논리합과 논리곱에 대응하면 불 대수 구조가 되므로, 위상공간에서 필터를 정의할 수 있다.
정의. 위상공간 $X$에 대해, $X$ 위의 필터 $\mathcal{F}$는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X$의 부분집합들의 모임이다.
- $X \in \mathcal{F}, \varnothing \notin \mathcal{F}$
- $A, B \in \mathcal{F} \implies A \cap B \in \mathcal{F}$
- $A \in \mathcal{F}, A \subseteq B \implies B \in \mathcal{F}$
추가로 다음을 만족하면 초필터이다.
- $A \notin \mathcal{F} \implies X \setminus A \in \mathcal{F}$
위상수학에서 중요한 필터 중 하나는 근방 필터이다. 먼저 근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의. 위상공간 $X$에 대해 $N \subseteq X$가 $x \in X$의 근방neighbourhood이라는 것은, 어떤 열린집합 $U$가 존재하여 $x \in U \subseteq N$라는 것이다.
근방은 열린집합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근방이 열린집합일 경우 열린 근방이라고 한다. 이는 근방과 열린 근방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일부 교재의 관행과 대조적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표기. $x$의 근방들의 모임을 $\mathcal{N}(x)$ 또는 $\mathcal{N}_x$라고 표기한다.
$\mathcal{N}(x)$는 필터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mathcal{N}(x)$를 근방 필터라고 부른다.
정의. 위상공간 $X$의 부분집합들의 모임 $\mathcal{C}$가 다음을 만족할 때, $\mathcal{C}$를 예비 필터prefilter 또는 필터 기저filter base라고 부른다.
- $\varnothing \notin \mathcal{C}$
- $A, B \in \mathcal{C} \implies \exists C \in \mathcal{C} : C \subseteq A \cap B$
즉, 필터가 교집합에 대해 닫혀 있는 한편 예비 필터는 교집합에 대해 “약하게” 닫혀 있다. $\mathcal{C}$가 예비 필터일 때, $\mathcal{C}$로부터 다음과 같이 필터 $\mathcal{F}$를 생성generate할 수 있다.
\[\mathcal{F} = \{ F \subseteq X : C \subseteq F \text{ for some } C \in \mathcal{C} \}\]또한 사상 $f: X \to Y$와 $X$ 위의 필터 $\mathcal{F}$가 주어졌을 때, 다음 집합족은 예비 필터이다.
\[\mathcal{C} = \{ f(F) : F \in \mathcal{F} \}\]표기. $\mathcal{C}$가 생성하는 필터를 $f(\mathcal{F})$와 같이 표기한다.
$f$가 전사onto일 경우 $\mathcal{C} = f(\mathcal{F})$라서 다루기 편하다. 또한 $f$가 전사일 때 다음이 (자명하게) 성립한다.
정리. $f: X \to Y$가 전사이고 $\mathcal{F}$가 $X$ 위의 초필터일 때, $f(\mathcal{F})$는 $Y$의 초필터이다.
모든 필터는 초필터로 확장될 수 있다. 증명은 이전 글을 참고하라 (선택 공리를 사용한다).
정리. $\mathcal{F}$가 $X$ 위의 필터일 때, $X$ 위의 초필터 $\mathcal{U}$가 존재하여 $\mathcal{U} \supseteq \mathcal{F}$이다.
정의. 필터 $\mathcal{F}$가 $\mathcal{N}(x)$를 포함할 때 $\mathcal{F}$는 $x$로 수렴한다고 하며, $\mathcal{F} \to x$와 같이 적는다.
예를 들어 예비 필터 $\lbrace (0, \epsilon) : \epsilon > 0 \rbrace $로 생성되는 필터는 $0$으로 수렴한다 (이 예시는 $\mathcal{F} \to x$라고 해서 $\mathcal{F}$의 모든 원소가 $x$를 원소로 가질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
필터 수렴의 주요 성질은 다음과 같다.
정리.
- $E \subseteq X$에 대해 $x \in \overline{E}$일 필요충분조건은 어떤 필터 $\mathcal{F}$가 존재하여 $E \in \mathcal{F}$이고, $\mathcal{F} \to x$인 것이다.
- $f: X \to Y$가 연속일 필요충분조건은 임의의 필터 $\mathcal{F}$에 대해 $\mathcal{F} \to x$라면 $f(\mathcal{F}) \to f(x)$인 것이다.
이는 1차 가산 공간에서 점렬로 폐포와 연속함수를 특징지었던 것을 일반화한 것이다.
곱공간에서 필터의 수렴은 각 요소 공간에서의 수렴과 동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정리. 곱공간 $\prod_{i \in I}X_i$ 위의 필터 $\mathcal{F}$가 $x$로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각각의 $i \in I$에 대해 $\pi_i(\mathcal{F}) \to \pi_i(x)$인 것이다.
이제 티호노프 정리를 증명해 보자. 핵심은 다음의 보조정리이다.
보조정리. $X$가 콤팩트할 필요충분조건은 $X$의 모든 초필터가 수렴하는 것이다.
$(\Rightarrow)$ $\mathcal{F}$가 수렴하지 않는 $X$의 초필터라고 하자. $\mathcal{F}$가 어느 점으로도 수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임의의 $x \in X$에 대해 어떤 열린집합 $U_x$가 존재하여 $U_x \notin \mathcal{F}$라는 것이다. $\mathcal{F}$가 초필터이므로 $X \setminus U_x \in \mathcal{F}$이다. 이제 $U_x$들의 모임 $\mathcal{C} = \lbrace U_x : x \in X \rbrace $를 생각하자. $\mathcal{C}$는 $X$를 덮으며, $X$가 콤팩트하므로 유한 부분덮개 $\lbrace U_{x_1}, \dots, U_{x_n} \rbrace $을 가진다. 따라서,
\[\begin{align} &X \setminus (U_{x_1} \cup \dots \cup U_{x_n}) \\ &= (X \setminus U_{x_1}) \cap \dots \cap (X \setminus U_{x_n}) \\ &= \varnothing \end{align}\]그런데 각 $1 \leq i \leq n$에 대해 $X \setminus U_{x_i} \in \mathcal{F}$이므로, 필터의 교집합 닫힘에 의해 $\varnothing \in \mathcal{F}$가 되어 모순이다. □
$(\Leftarrow)$ $X$가 콤팩트하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X$의 열린 덮개 $\mathcal{C}$가 존재하여 $\mathcal{C}$는 유한 부분덮개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mathcal{P}$를 정의할 때,
\[\mathcal{P} = \{ X \setminus (U_1 \cup \dots \cup U_n) : U_i \in \mathcal{C} \}\]$\mathcal{P}$는 유한 교집합에 대해 닫혀 있으며 공집합을 원소로 가지지 않으므로 예비 필터이다. 이에 따라 $\mathcal{P}$는 필터로 확장될 수 있으며, 이 필터는 초필터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한 초필터를 $\mathcal{F}$라고 하자. 가정에 의해 $\mathcal{F}$는 어떤 점 $x$로 수렴한다. 즉, $\mathcal{N}(x) \subseteq \mathcal{F}$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x \in \bigcap_{F \in \mathcal{F}} \overline{F}\]그런데 이는 $\bigcap_{P \in \mathcal{P}} \overline{P} = \bigcap_{P \in \mathcal{P}} P = \varnothing$ ($\mathcal{C}$가 $X$의 덮개이므로) 에 모순된다. ■
이제 티호노프 정리는 거의 자명하게 따라 나온다.
정리. 콤팩트 공간들의 곱공간은 콤팩트 공간이다.
각각의 $i \in I$에 대해 $X_i$가 콤팩트 공간이라고 하자. $X$가 콤팩트할 필요충분조건은 임의의 $\prod_{i \in I}$ 위의 초필터 $\mathcal{F}$가 수렴하는 것이고, $\mathcal{F}$가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pi_i(\mathcal{F})$가 $X_i$에서 수렴하는 것이다. 그런데 $\pi_i$는 전사이므로 $\pi_i(\mathcal{F})$는 초필터이고, $X_i$는 콤팩트하므로 $\pi_i(\mathcal{F})$는 수렴한다. 이에 따라 $X$는 콤팩트하다. ■
본 글은 일체의 챗지피티 도움 없이 작성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밝히자면, 나는 현행의 돼지고기 사육은 굉장히 비윤리적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굉장히 라는 부사는 이 문제가 낙태 문제나 사형제 문제, 트롤리 딜레마보다 훨씬 자명하다는 입장까지를 표현한다.
돼지는 침팬지와 돌고래에 버금가는 가장 똑똑한 동물 중 하나이다. 돼지는 자아를 인식하고,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공간을 구획하며, 다른 돼지들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습성을 보인다. 특히 감수성이 풍부하여 다른 돼지의 고통을 보았을 때 똑같이 고통스러워할 뿐 아니라, 애완용으로 길러진 돼지는 강아지 못지않게 주인의 애정을 갈구한다. 그에 반해 현행 산업에서 돼지가 사육되는 환경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식용으로 사육되는 돼지의 90% 이상은 평생을 발 디딜 틈 없이 과포화된, 불결하고 어두침침한 우리에 갇혀 생활한다. 사육장은 스트레스, 고통, 싸움으로 인한 돼지 울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대다수의 산업에서 수퇘지는 고기가 더 맛있어진다는 이유로 진통제 없이 거세되며, 암퇘지는 쇠창살로 포박된 채 젖을 빨린다.
전 세계에서 식용으로 사육되는 돼지의 수는 약 10억 마리이므로, 인간중심주의를 받아들여 한 인간의 생명이 1천 마리의 돼지에 준하는 가치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100만 명의 사람을 “보다 맛있는 식사”를 위해 고문실에 몰아넣은 상황이니 굉장히 비윤리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마땅하다. “돼지고기 소비를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가?” 또는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은 지탄받아야 마땅한가?” 등의 질문은 사회·정치·문화적 맥락과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단적인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수 있어도, 돼지 사육의 윤리성만 두고 보았을 때 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하기란 극단적인 형태의 도덕 회의주의를 상정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돼지고기 산업 구조가 이처럼 굉장히 비윤리적이라면, 개개인에 의한 그 산업의 소비, 즉 생산된 돼지고기를 먹는 행위는 확실히 비윤리적이라는 결론은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는 해도, 앞서 말한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으로 인해 나는 이런 입장을 사회생활에서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회식 메뉴가 돼지고기로 결정되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윤리적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좋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회식에 가서는 돼지고기를 잘만 먹는다. 나에게는 모임 분위기를 초치고 주변 사람에게서 “채식주의자” 꼬리표가 달리는 사회적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가 없는 까닭이다. 참 비겁한 짓이다.
자아비판은 일기장에서 충분히 할 것이니 이쯤에서 일축하고, 이 글의 본론은 다른 것이다. 윤리적 책무를 덜기 위해 나는 대신 혼자서, 또는 돼지고기와 관련하여 나와 같은 윤리적 입장인 사람(∋ 여자친구)과 식사를 할 때는 돼지고기를 피하고자 한다. 동물의 고통 감수성과 해당 동물이 사육되는 환경을 함께 고려하면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생선류 순으로 윤리적 부담이 덜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연어이다. 따라서 돼지고기 대신 연어를, 그리고 고기가 당기는 날에는 소고기를 먹으면 만사 해결이다.
라는 생각의 식습관을 실천해 보았더니, 이것이 만사 해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잔고에서 돈이 물 흐르듯이 빠져나간 것이다. 물론 “돼지고기 대신 소고기와 연어를 먹어 보니 돈이 많이 들었다” 자체는 굉장히 자명한 관찰이다. 그러나 주어를 치환하면 조금 덜 자명한 관찰이 얻어진다. 즉, “윤리적 식습관을 시도해 보니 돈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변명의 심정에서 나온 관찰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식비가 바닥이 나더라도 사찰 음식 위주의 식단이라면 저렴하게 윤리적 식습관을 실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역시 맛이 없다는 것이다. 적은 돈만으로 윤리적 식습관을 실천할 수는 있어도,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경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런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다. “윤리적 식습관의 실천 난이도는 경제력에 반비례한다.” (공정 무역 식품 또한 이에 해당하는 사례이다)
비단 식습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령 취미의 경우를 보자. 설명의 편의를 위해 — 이것을 취미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악성 유튜브 시청과, 양서 독서라는 다소 과장된 극단을 대조해 보겠다. 여기서 악성 유튜브란 가짜뉴스, 성 상품화, 황색언론 등 윤리적으로 문제적인 내용을 통해 사용자에게 즉각적인 도파민을 주는 유튜브 채널을 말하고, 양서란 인문학적 가치를 잘 전달하고 독자로 하여금 성찰과 사색을 자극하는 책을 말한다 (수험준비서, 주식투자서 등을 배제하기 위한 표현이다).
취미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부당해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이 경우 전자는 비윤리적인 취미이고 후자는 윤리적인 취미라는 주장은 매우 합당한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 독자는 내가 의도하는 결론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유층일수록 악성 유튜브를 보는 것보다 양서 독서를 할 확률이 높고, 빈곤층일수록 도리어 악성 유튜브에 빠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1
물론 이것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예시이다. 모든 “빈곤층 취미”는 비윤리적이고 “부유층 취미”는 윤리적인 것은 결코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골프장을 만든답시고 산을 깎고, 배기가스 나 몰라라 하면서 스포츠카 예닐곱 대를 보유하는 부유층의 “취미”야말로 정말 문제적인 것 아닌가? 이것은 합당한 지적이다. 이 지적에 답하기 전에, 윤리적 소비 및 활동이 경제력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실천하기 어려워지는 원리를 서술해 보자.
첫째 — 진부한 소리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윤 최대화이기에, 특히 저소득층이 주요 소비자인 저가 시장의 경우 윤리적 고려는 한참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돼지고기와 연어의 사례에 해당한다. 모든 기업이 윤리적 하한을 설정하여 자율적으로 약속을 이행할 일은 죄수의 딜레마처럼 전무하다. 윤리라는 가치로 통합된 국민 다수가 정부를 통해 주권을 발휘하여 기업에 강제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교착에 빠진 현재의 정국을 보아 이 또한 만무하다.
둘째 — 기본적으로 윤리는 이성적 성찰과 행동적 실천을 모두 요구하기 때문에 추구하는 데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유튜브와 독서의 사례에 해당한다. 이성적 성찰과 행동적 실천 중 하나만 추구하기도 굉장히 힘든 마당에 — 가령 다이어트는 후자만을 요구하는데도 성공률은 궤멸적이다 — 양쪽을 다 요구하는 윤리적 삶의 추구는, 일과 중 근로(노동)가 끝난 이후에도 그것을 추구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도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하루 중 8시간을 육체노동을 하고 귀가한 사람이 피터 싱어의 책을 읽으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거의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가령 나는 스스로 독서를 즐긴다고 자부하지만, 훈련소 있었을 때 힘든 일과가 끝난 밤에는 그냥 침대에 누워서 멍이나 때렸지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진정 “사치”이다.
이제 앞서 제기되었던 지적, 즉 부유층의 취미가 오히려 더 심각하게 비윤리적인 경우가 많다는 지적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부유층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그는 그의 자본으로 해외 원조 재단을 설립하는 굉장히 윤리적인 실천을 할 수도 있고 (논의상 이 재단의 설립에 돈세탁 등의 목적은 없다고 하자), 산등성이를 깎아서 골프장을 만드는 굉장히 비윤리적인 실천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절대다수의 부유층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보장된 선택의 자유이다.
빈곤층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의 일상은 사회구조적으로 주입된 사소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비윤리적인 소비들로 점철되어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부유층은 자신의 돈을 굴려 불어나게 할지, 사치를 부릴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빈곤층에게는 그 자유가 없다. 그로서는 저금을 하거나 개미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인플레이션과 시장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이는 통상 돈을 사소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잃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안정된 경제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굉장히 이상理想, 異常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잔인하게 사육된 돼지고기를 먹고, 개발도상국 노동자를 착취한 제품을 구입하고, 도파민 위주의 정치·시사 유튜브를 보고, 동물복지, 빈곤, 기아, 난민 문제를 뜬구름 잡는 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본 글의 제목을 살펴보자. “윤리적 삶은 사치품이다”라는 명제는 당연히 슬로가니어링sloganeering이다. 모든 슬로건이 그렇듯이 이 진술은 자극적이고 신선하지만 (따라서 글의 제목으로 적절하다) 그것이 실제로 진술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글의 논점으로서는 부적절하다). “윤리적 삶은 사치품이다”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이 명제는 앞서 내린 결론의 주어를 윤리적 삶 일반으로 확장한 주장, 요컨대 “윤리적 삶의 실천 난이도는 경제력에 반비례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약한 주장이라고 부르자. 약한 주장은 기술적인 주장이다. 물론 “윤리적”이라는 표현은 규범적이며, 무엇이 “윤리적 삶”에 해당하는지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견이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외연이 전제되고 나면 약한 주장 자체는 기술적이며, 그 원인은 상술한 두 가지 원리에 있다. 이는 경제력과 엥겔 지수는 반비례한다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관찰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도발적인 주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가령 연어를 일상적으로 사 먹을 경제력이 안 되는 사람이 — 철수라고 부르자 — 맛있는 한 끼를 위해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하자. 서론에서 전제된 바에 따르면 이는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만약 철수가 이 주장을 듣는다면 그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때아닌 윤리적 비방에 반발할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철수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윤리적 진술이 당위 및 책임의 부여와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예제는 비윤리적이다”라는 진술은 암시적으로 노예제의 비윤리성에 대한 책임을 노예주에게 귀속하며, 노예주에게 노예를 해방할 당위를 부여한다. 이 당위를 이행하지 않은 노예주는 그가 받을 사회적 지탄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철수가 돼지고기를 먹은 것은 비윤리적이다”라는 도덕적 판단의 잣대는 보통 돼지고기를 먹은 철수를 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정말로 “윤리적 삶은 사치품”이라면 이런 조준은 부당해 보인다. 윤리가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치품”이라면, 즉 각고의 인내와 기회비용을 치러야 가까스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닌, 윤리를 사치품으로 만들어버린 사회 전체에 있지 않은가?
이처럼 약한 주장을 근거로, 사회적으로 습관화된 비윤리적 행동의 책무를 개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에 귀속하는 규범적 주장을 강한 주장이라고 부르자. 강한 주장에 따르면 철수가 돼지고기를 먹은 것의 윤리적 책임은 철수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사소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 정치인들의 동물복지 공약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딜레마를 드러내고자 한다. “좌파”나 “우파”라는 이름표는 매우 두루뭉술한 사상들의 잡동사니이지만, 그럼에도 비교적 뚜렷한 특징은 “좌파”가 “우파”에 비해 개인의 도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주의, 평화주의, 비거니즘, 노동자 운동, 페미니즘, 퀴어 운동, 다문화주의 등은 통상 좌파 강령으로 분류된다. 이들 강령의 정당성은 경제적 성장이나 기술 발전이 아닌 개인 단위의 윤리적 주문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윤리적 삶이 사치품”이라면, 좌파 진영은 약자의 진영임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그 실천을 위해서는 충분한 경제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딜레마를 품고 있다. 특히 자신의 권익보다 공동체의 상생을 중요시하는 것이 좌파의 가치 중 하나라면, 이 가치의 실현은 자신의 권익을 포기하는 것이 자신의 생계 내지 생존과 직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좌파 연대의 분열을 어느 정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좌파에는 크게 두 가지 구조가 있다. 첫째는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절박한 사람을 경제적 또는 사상적으로 지원하는 구조이고 (지식인 사회), 둘째는 절박한 사람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스스로 투쟁하는 구조이다 (노동조합). 두 구조는 좌파라는 같은 지붕 아래서 살고 있기에 완전히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가려지고는 한다. 이타심과 이기심이 깨끗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자는 이타심의 원리로, 후자는 이기심의 원리로 작동한다. 이 말의 의도는 후자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권력을 가지게 됨을, 그로 인해 좌파에 분열이 생기는 이유를 해명하고자 함이다.
노동자 운동을 예로 들자면, 노동자의 절대다수는 당연히 노동자 운동에만 관심이 있고 페미니즘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 오히려 적대적인 경우가 —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노동권 투쟁이 최종 목표이다. 그러나 소위 “엘리트 좌파 지식인”에게 있어 노동권 투쟁은, 정의롭고 윤리적인 사회라는 더 상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다. 따라서 미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남성 노동자의 연봉을 인상할 수 있는 방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방침을 결코 채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방침을 추구하는 사람을 좌파 정신에 대한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태도가 좌파 진영이 대표하고자 하는 바로 그 집단, 다름 아닌 노동자 집단의 대다수를 좌파 정신에 대한 적으로 돌리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윤리적 삶이라는 사치품”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와 도덕에 기반한 지식인의 좌파는 상아탑에서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만약 그들 지식인이 실제 현장으로 내려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생생한 말들 — “짱깨놈들 때문에 대한민국 망하게 생겼다”, “전장연 새끼들 지하철 가지고 지랄하네”, “오늘 밤에는 내가 좋은 데로 데려가 준다” — 을 듣는다면 정나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글을 통해 지식인들은 좌파 진영에서 빠져야 한다거나, 지식인들은 일찍이 좌파와 단념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반대로 지식인들이 청산유수로 사회적 약자들을 감화시켜 그들에게 보편 윤리와 정의의 가치를 일깨우고, 그들로 하여금 공통 연합을 구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사실 나는 앞서 내가 좌파의 딜레마라고 부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소 무책임하게도 잘 정립된 생각이 아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 하나만큼은 확실히 주장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이라면, 앞서 논의한 강한 주장을 항상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천하는 좌파는 약자들과 부대끼는 과정에서, 약자는 다른 약자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는 믿음, 약자는 윤리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깨어지는 과정을 감내해야만 한다. 분명 이것은 환멸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강한 주장은, 이 환멸의 책임을 약자 개개인의 윤리적 타락에서가 아닌, 이들을 보편 윤리와 정의의 감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사회적 구조에 따져야 함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우리 지식인에게는 — 이 뻘글을 지금까지 읽고 있는 독자는 상대적 엘리트로 간주된다 —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유해야 할 의무 또한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런 사유를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 즉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윤리적 삶은 사치품이라는 자각 속에서, 약자의 다른 약자에 대한 비존중까지 존중하는 것, 즉 그것을 개인의 책임에 귀속하지 않는 것, 그것으로 좌파의 길에 환멸을 느끼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 “윤리적인 삶”이 아닐까?
세심한 독자를 위해 미주를 달자면 이 주장은 베이지안적으로 읽어야 한다. 말하자면 P(x가 현재 양서 독서 중이다 | x의 경제력이 e이다)는 e에 대한 증가함수이며, “양서 독서”를 “악성 유튜브 시청”으로 대체할 경우 감소함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모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기득권 중의 기득권에 속한 사람이 악성 유튜브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확률에 관한 것이고, 확률에 관한 한 이 주장은 뒤엎기 어렵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