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수라는 신기루: 짧은 논리학 이야기
14 Sep 2025어느 날 디멘은 외계인을 만났습니다. 외계인이 디멘에게 물었습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 중에서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 도대체 자연수가 뭐야?
뭐긴 뭐야. 자연수란 1부터 시작해서 2, 3, … 이렇게 순서대로 나아가는 수 체계야.
외계인음…그러면 이것도 자연수야?
엥, 그럴 리가! 자연수는 끝없이 이어져.
외계인끝없이 이어진다고? 고리를 이룬다는 말인가? 그럼 1, 2, 3, 4, 5, 3, 4, 5, 3, 4, 5, …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데.
맙소사, 그 뜻이 아니야. 고리 같은 거 없이 끝없이 이어져.
외계인흠...그럼 중간에 가지라도 치나?
그것도 아니야! 가지는 없어!
외계인알겠어. 그렇다면 혹시 $c$도 자연수니?
디멘$c$라니, 무슨 말이야?
외계인너가 알려준 자연수의 정의대로라면 $c$가 자연수가 아닐 이유는 없는데? 자연수는 끝없이 이어진다고 했지만 모든 자연수가 그러한 연쇄에 포함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잖아.
저건 또 뭐야... 자연수에는 자연수밖에 없어!
외계인자연수에는 자연수밖에 없다니, 순환논법이 따로 없네.
디멘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외계인무슨 소리야, 난 진짜 자연수가 뭔지 모르겠어. 너야말로 자연수의 정의를 제대로 알려줘야 내가 이해를 할 거 아니야.
디멘자연수란...음...그러니까...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 순간, 데데킨트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 주지. 자연수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을 말해.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내가 증명해 놓았으니 더 이상 오해의 여지라고는 없지.
데데킨트의 자연수 정의. 집합 $A$, 원소 $e \in A$, 그리고 함수 $S: A \to A$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면 $A, e, S$는 각각 자연수 집합, $0$, 그리고 $x \mapsto x + 1$에 대응된다.
- $S(x) = e$를 만족하는 $x$는 존재하지 않는다.
- $S(x) = S(y)$라면 $x = y$이다.
- $A$를 정의역으로 하는 임의의 명제 $P(x)$에 대해 다음 두 조건이 성립한다면 $P(x)$는 $A$의 모든 원소에 대해 참이다.
- $P(e)$가 참이다.
- $P(x)$가 참이라면 $P(S(x))$가 참이다.
데데킨트의 대답에 외계인은 흡족해했지만, 이내 또다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세 번째 조건에 "임의의 명제"라는 표현이 말이 돼? $P(x)$가 임의의 명제라면 $P(x)$는 "$x$가 자연수이다" 가 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자연수의 정의에 자연수에 대한 명제가 포함되는 건 순환논법일 텐데?
데데킨트엇...그런가...?
외계인애초에 "명제"라는 것이 정확히 뭐야? "$x$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다" 는 잘 정의된 명제야?
디멘(만약 $x$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라면 $x$는 $x$의 정의에 해당하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게 되고, $x$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라면 $x$는 $x$의 정의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게 되고...엥?)
뜻밖의 지적에 데데킨트가 우물쭈물하자 옆에서 뢰벤하임이라는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확실히 "임의의 명제"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어 보이네. 아무래도 수학에서 이런 표현은 제한해야겠어. 이렇게 제한된 논리학을 1차 논리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1차 논리로 자연수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이 말에 스콜렘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맞아. 그리고 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어.
스콜렘의 발언에 모두가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불가능해. 1차 논리로는 자연수의 필요충분조건을 기술할 수 없어. 구체적으로, 자연수의 정의를 시도하는 모든 1차 논리적 정의에는 자연수가 아닌 반례가 존재해. 따라서 자연수는 논리로 환원될 수 없어. 자연수를 순환논법 없이는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이야.
뢰벤하임-스콜렘 정리. 자연수를 비롯하여, 원소가 무한히 많은 수 체계는 1차 논리로 유일하게 특정될 수 없다.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자연수가 뭔지 아는 거야? 알고 보면 인간들은 저마다 자연수를 다르게 알고 있는 거 아냐?
외계인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신기루 같은 자연수의 실체에 대해 할 말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Note.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왜곡된 역사적 · 수학적 · 철학적 내용이 있습니다. 1차 논리의 탄생은 뢰벤하임을 비롯한 여러 수학자들의 점진적인 연구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데데킨트의 자연수 정의가 사용하는 2차 논리가 정말로 순환적인지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콜렘의 역설은 자연수에 관한 것이 아닌 집합론에 관한 것인데,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두 현상은 유사하기 때문에 말풍선에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