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멘의 블로그 이데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베타 함수를 통한 페아노 산술에서의 괴델 수 정의

수학
논리학

요약. 1차 페아노 산술은 술어에 대한 양화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덧셈과 곱셈 공리를 별도로 요구한다. 그러나 지수나 계승 등의 추가적인 연산은 — 튜플을 페아노 산술에서 정의할 수 있는 한 — 별도의 공리 없이 정의 가능하다. 그리고 튜플은 베타 암호화를 통해 페아노 산술에서 정의 가능하기 때문에, 페아노 산술은 지수, 계승, 소인수분해, 나아가 괴델 수까지 형식화할 수 있다.

1. 서론

정의. 페아노 산술(Peano arithmetics, PA)은 $(0, S, +, \cdot)$를 부호수(signature)로 가지는 이론으로, 공리는 다음과 같다.

  1. $\forall x : S(x) \neq 0$
  2. $\forall x, y : S(x) = S(y) \rightarrow x = y$
  3. $\forall x : x + 0 = x$
  4. $\forall x, y : x + S(y) = S(x + y)$
  5. $\forall x, y : x \cdot 0 = 0$
  6. $\forall x, y : x \cdot S(y) = (x \cdot y) + x$

추가로 다음의 귀납 공리꼴(axiom schema)을 가진다. 임의의 1차 논리식 $\phi(x)$에 대해,

 7. $\big[ \phi(0) \land \forall x \; [ \phi(x) \rightarrow \phi(S(x)) ] \big] \rightarrow \forall x \;\phi(x)$

추가적으로 편의를 위해 $<, -, \bmod$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begin{aligned} &x < y : &&\exists z \neq 0\; [x + z = y]\\ &x - y = z : &&x = y + z \\ &x \bmod y = z: && (z < y) \land \exists q \;[ qy + z = x ] \end{aligned}\]

역사적으로 데데킨트가 처음 제시한 페아노 산술은 2차 논리 이론이었기 때문에 귀납 공리꼴 대신 귀납 공리가 있었다. 또한 3번부터 7번 공리가 없었다.

정의. 2차 논리 페아노 산술은 $(0, S)$를 부호수(signature)로 가지는 이론으로, 공리는 다음과 같다.

  1. $\forall x : S(x) \neq 0$
  2. $\forall x, y : S(x) = S(y) \rightarrow x = y$
  3. $\forall \phi \bigg[ \big[ \phi(0) \land \forall x \; [ \phi(x) \rightarrow \phi(S(x)) ] \big] \rightarrow \forall x \;\phi(x)\bigg]$

나머지 공리가 불필요한 이유는, 2차 논리는 술어에 대한 양화를 허용하기 때문에 2차 논리식만으로 덧셈과 곱셈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w = u + v$는 다음 논리식과 동치이다.

\[\forall \phi \bigg[ \forall x, y, z \big[ \phi(x, 0, x) \land (\phi(x, S(y), z) \rightarrow \phi(x, y, S(z)) \big] \rightarrow \phi(u, v, w) \bigg]\]

그러나 2차 논리는 수많은 수학적 · 철학적 허점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서두에서 소개한 1차 논리 페아노 산술이 표준으로 선택되었다. 이 선택의 함의는 첫째로 귀납 공리가 귀납 공리꼴이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덧셈과 곱셈을 별도의 공리를 통해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남는다. 덧셈과 곱셈 말고 다른 연산은 따로 정의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지수, 소인수분해, 계승과 같은 연산은 별도의 공리 없이 정의 가능할까? 나아가, 임의의 논리식을 자연수에 대응시키는 괴델 수 기법은 페아노 산술만으로 정의 가능할까?

2. 튜플

이 의문에 답하는 혜안은, 튜플을 페아노 산술에서 정의할 수 있다면 기타 수많은 연산이 정의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튜플이란 $(1, 4, 2)$와 같은 유한한 자연수의 나열을 말한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술어와 함수들이 정의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 $\mathrm{Tup}(\tau):$ $\tau$가 튜플이다.
  • $\mathrm{At}(\tau, i):$ $\tau$가 튜플일 때, $\tau$의 $i$번째 자연수를 반환한다.
  • $\mathrm{Len}(\tau):$ $\tau$의 길이를 반환한다.

편의를 위해 $\mathrm{At}(\tau, i)$를 $\tau[i]$로 쓰도록 하자. 예를 들어 $\tau = (1, 4, 2)$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인덱스는 0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mathrm{Tup}(\tau) \; \land \; \mathrm{Len}(\tau) = 3 \;\land\; \tau[1] = 4\]

튜플을 사용하면 다음과 같이 $z = x^y$를 정의할 수 있다.

\[\forall \tau \bigg[ \big[ \mathrm{Tup}(\tau)\; \land \; \tau[0] = 1 \;\land \forall i < y (\tau[i + 1] = \tau[i] \cdot x) \big] \rightarrow \tau[y] = z \bigg]\]

3. 베타 암호화

그렇다면 튜플을 덧셈과 곱셈, 그리고 1차 논리식만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가능하다”이다. 아니나다를까역시나적시나 이 결과를 처음 증명한 사람은 괴델이다. 먼저 다음의 정리를 상기하자.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 $(n_1, \dots, n_k)$가 켤레서로소(pairwise coprime)라고 하자. $0 \leq r_i < n_i$인 임의의 $(r_1, \dots, r_k)$에 대해 다음을 만족하는 수 $x$가 언제나 존재한다.

\[x \bmod n_i = r_i\]

괴델의 아이디어는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에서 $x$에 해당하는 수를 튜플 $(r_1, \dots, r_k)$의 코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x$로부터 $(r_1, \dots, r_k)$를 복호화하기 위해서는 $(n_1, \dots, n_k)$가 주어져야 하는데, 이는 또다시 튜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괴델은 다음의 보조정리를 꺼내든다.

보조정리. $n!+ 1, 2n! + 1, \dots, n \cdot n! + 1$은 켤레서로소이다.

증명. $1 \leq a < b \leq n$에 대해 $u = an! + 1, v = bn! + 1$이라고 하자. 유클리드 호제법에 의해,

\[\mathrm{gcd}(u, v) = \mathrm{gcd}(u, v - u) = \mathrm{gcd}(an! + 1, (b - a)n!)\]

이다. $(b - a)n!$의 모든 약수의 집합은 $\lbrace 1, 2, \dots, n\rbrace $이다. 그런데 이중 어느 원소도 $an! + 1$의 약수가 아니므로 $\mathrm{gcd}(an! + 1, (b - a)n!) = \mathrm{gcd}(u, v) = 1$이다. □

이제 우리는 튜플을 순서쌍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정의. 튜플 $(r_1, \dots, r_k)$를 다음과 같이 순서쌍 $\langle a, b \rangle$로 표현한다.

  • $b = n! \quad \text{where} \quad n = \max(r_1, \dots, r_k, k)$
  • $a \bmod (kb + 1) = r_k$

단, $a$는 2번 조건을 만족하는 자연수 중 가장 작은 자연수로 선택한다.

한편 튜플은 칸토어 대응을 통해 자연수로 표현이 가능하다.

정의.

\[\langle a, b \rangle = \frac{(a + b)(a + b + 1)}{2} + b\]

이로써 우리는 튜플 $\tau$를 자연수 $n$으로 암호화(coding)할 수 있다. 그리고 역으로 $n$이 주어지면 덧셈, 곱셈, 그리고 나머지 연산만을 사용하여 $\tau$를 복호화해낼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연산은 덧셈, 곱셈, 그리고 1차 논리로부터 쉽게 정의가 가능하므로, 목표가 달성되었다.

역사적으로 괴델이 증명한 정리는 다음과 같다.

$\beta$-함수 보조정리. 임의의 자연수열 $(n_1, \dots, n_k)$에 대해, 어떤 자연수 $a, b$가 존재하여 $1 \leq i \leq k$에 대해 $\beta(a, b, i) = n_i$이다. 여기서 $\beta$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 함수이다.

\[\beta(x, y, i) = x \bmod (iy + 1)\]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과정을 베타 암호화(Beta coding)라고 부른다. 괴델은 베타 암호화를 이용하여 지수 연산과 소인수분해를 PA에서 성공적으로 정의했으며, 이로부터 괴델 수와 비롯된 여러 술어를 PA에서 형식화할 수 있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원래 이 글의 목표는 이 과정을 모두 개괄하는 것이었으나 때늦게 찾아온 필자의 귀찮음 이슈와, 글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후 내용은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하리라는 생각으로 이만 줄인다.

워시의 정리

수학
논리학

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5. 초자연수의 비표준적 특징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초자연수는 $[0], [1], [2], \dots$와 같이 표준 자연수와 상응하는 것들이었다. 이제 표준 자연수와는 괴리가 있는 초자연수들을 살펴 보자.

다음의 초자연수 $\mathfrak{n}$을 보자.

\[(1, 2, 3, 4, \dots) \in \mathfrak{n}\]

초자연수의 정의가 동치류이기 때문에 등호가 아닌 포함 관계로 표현함에 유의하라. 초자연수에서 부등호의 정의를 상기하면, 자연수 $n$에 대해 $[n] < \mathfrak{n}$임을 알 수 있다. 즉, $\mathfrak{n}$은 모든 자연수보다 큰 초자연수이다. 따라서 초자연수에서는 다음이 성립한다.

\[\phi_1 : \exists x \; ( \lbrace y : y < x \rbrace \text{ is infinite } )\]

위 명제는 자연수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다음의 초자연수 $\mathfrak{m}$을 보자.

\[(1, 2!, 3!, 4!, \dots) \in \mathfrak{m}\]

표준 자연수 $n$에 대해 $\mathfrak{m}$은 $[n]$으로 나누어떨어진다. 즉, $\mathfrak{m}$은 모든 자연수를 약수로 가진다. 따라서 초자연수에서는 다음이 성립한다.

\[\phi_2 : \exists x \; (\lbrace y : y \mid x \rbrace \text{ is infinite })\]

위 명제 또한 자연수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저번 글의 서론에서 필자는 자연수와 초자연수가 논리적으로 구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phi_1$과 $\phi_2$는 $\mathbb{N}^*$에서는 참이지만 $\mathbb{N}$에서는 거짓이므로, 둘은 논리적으로 구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표면적인 역설을 해결하는 실마리는, $\phi_1$과 $\phi_2$가 1차 논리로 표현 불가능한 문장이라는 사실이다. 콤팩트성 정리에 의해 “…가 유한하다”는 1차 논리로 표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mathbb{N}^*$과 $\mathbb{N}$이 논리적으로 구분 불가능하다는 말의 엄밀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정의. 언어 $\mathcal{L}$의 모형 $\mathcal{M}_1$과 $\mathcal{M}_2$가 초등적으로 동등(elementarily equivalent)하다는 것은 임의의 (1차 논리) 문장 $\phi$에 대해

\[\mathcal{M_1} \vDash \phi \iff \mathcal{M}_2 \vDash \phi\]

가 성립하는 것이다.

정리. $\mathbb{N}$과 $\mathbb{N}^*$은 초등적으로 동등하다.

위 정리는 워시의 정리의 특수한 결과이다. 워시의 정리를 소개하기 앞서, 일반화된 초곱의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6. 초곱

집합 $I$와, $I$ 위의 자유 초필터 $\mathcal{U}$가 주어졌다고 하자. 또한, 언어 $\mathcal{L}$의 모형 $\lbrace \mathcal{M}_i \rbrace_{i \in I}$가 주어졌다고 하자. 이때, 초곱(ultraproduct) $\mathcal{M}^* = \prod \mathcal{M}_i / \mathcal{U}$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초곱의 원소

$\mathcal{M}^*$의 원소는 $\lbrace (a_i)_{i\in I} : a_i \in \mathcal{M}_i \rbrace$가 $\sim$에 대해 이루는 동치류이다. 여기서 $\sim$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a_i)_{i\in I} \sim (b_i)_{i \in I} \iff \lbrace i \in I : a_i = b_i \rbrace \in \mathcal{U}\]

초곱 위의 연산

$f(x)$가 $\mathcal{L}$의 함수라고 하자. $\mathcal{M}^*$의 원소 $\mathfrak{a} = [(a_i)_{i\in I}]$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f(\mathfrak{a}) = [(f(a_i))_{i \in I}]\]

위 정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n$항 함수로 일반화된다.

초곱 위의 술어

$P(x, y)$가 $\mathcal{L}$의 술어라고 하자. $\mathcal{M}^*$의 두 원소 $\mathfrak{a} = [(a_i)_{i\in I}]$와 $\mathfrak{b} = [(b_i)_{i\in I}]$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mathcal{M}^* \vDash P(\mathfrak{a}, \mathfrak{b}) \iff \lbrace i \in I : \mathcal{M}_i \vDash P(a_i, b_i) \rbrace \in \mathcal{U}\]

위 정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n$항 술어로 일반화된다.

초곱 위의 연산과 술어를 정의할 때, 연산과 술어의 결과가 동치류에서 어떤 원소를 대표자로 선택하든 상관없이 같음을 보여야 한다. 이것은 $\mathcal{U}$의 교집합 속성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얻어지므로 연습문제로 남긴다.

이로써 우리는 초자연수를, $I, \mathcal{U}, \mathcal{L}, \mathcal{M}_i$가 각각 다음과 같을 때 도출되는 초곱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

  • $I = \mathbb{N}$
  • $\mathcal{U} =$ 프레셰 초필터
  • $\mathcal{L} = (0, S, <)$
  • $\mathcal{M}_i = \mathbb{N}$

비슷한 방식으로 초실수(hyperreals)를 정의할 수 있다.

  • $I = \mathbb{N}$
  • $\mathcal{U} =$ 프레셰 초필터
  • $\mathcal{L} = (0, 1, +, ⋅, <)$
  • $\mathcal{M}_i = \mathbb{R}$

7. 워시의 정리

워시의 정리(Łoś’s Theorem). 초곱 $\mathcal{M}^* = \prod \mathcal{M}_i / \mathcal{U}$가 주어졌을 때, 임의의 $\mathcal{L}$-문장 $\phi$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

\[\mathcal{M}^* \vDash \phi \iff \lbrace i \in I : \mathcal{M}_i \vDash \phi \rbrace \in \mathcal{U}\]

Proof. $\phi$에 대한 구조적 귀납법으로 증명한다.

1. $\phi$가 원자 명제이다

“초곱 위의 술어” 정의에 의해 자명하게 성립한다.

2. $\phi := \psi \land \theta$

\[\begin{aligned} &\mathcal{M}^* ⊨ φ\\ &\iff \mathcal{M}^* ⊨ ψ \land \mathcal{M}^* ⊨ θ\\ &\iff \lbrace i ∈ I \mid \mathcal{M}_i ⊨ ψ \rbrace ∈ \mathcal{U} \land \lbrace i ∈ I \mid \mathcal{M}_i ⊨ θ \rbrace ∈ \mathcal{U} &&(*) \\ &\iff \lbrace i ∈ I \mid \mathcal{M}_i ⊨ ψ \rbrace \cap \lbrace i ∈ I \mid \mathcal{M}_i ⊨ θ \rbrace ∈ \mathcal{U} &&(**) \\ &\iff \lbrace i ∈ I \mid \mathcal{M}_i ⊨ ψ \land \mathcal{M}_i ⊨ θ \rbrace ∈ \mathcal{U}\\ &\iff \lbrace i ∈ I \mid \mathcal{M}_i ⊨ ψ∧θ \rbrace ∈ \mathcal{U}\\ &\iff \lbrace i ∈ I \mid \mathcal{M}_i ⊨ φ \rbrace ∈ \mathcal{U} \end{aligned}\]

$(*)$는 귀납 가정에 의해 성립하고, $(**)$는 $\mathcal{U}$의 교집합 닫힘 속성으로 성립한다.

3. $\phi := \lnot \psi$

2와 비슷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단, 귀납 가정과 $\mathcal{U}$의 초필터 속성($A \in \mathcal{U} \lor A^c \in \mathcal{U}$)를 사용한다.

4. $\phi := \exists x\; \psi$

2와 비슷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단, 귀납 가정만 사용해도 충분하다.

모든 명제는 1, 2, 3, 4로 구성할 수 있으므로 귀납법에 의해 정리가 증명되었다. ■

따름정리. $\mathbb{N}$과 $\mathbb{N}^*$은 초등적으로 동등하다.

Proof. 워시의 정리에 의해 $\mathbb{N}^* \vDash \phi$일 필요충분조건은 $\lbrace i \in \mathbb{N} : \mathbb{N}^\ast_i \vDash \phi \rbrace \in \mathcal{U}$인 것이다. 그런데 $\mathbb{N}^*_i = \mathbb{N}$이므로, 필요충분조건은 $\mathbb{N} \vDash \phi$로 환원된다. ■

프레셰 필터와 비표준 자연수

수학
논리학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에 따르면 표준 산술 모형과 초등적으로 동등(elementarily equivalent)하지만 구조적으로 상이(nonisomorphic)한 모형이 존재한다. 달리 말해, 자연수가 만족하는 모든 1차 논리 명제를 만족하지만 자연수가 아닌 수 체계가 존재한다.

이 글(시리즈)에서는 초곱(ultraproduct)을 이용하여 대표적인 산술의 비표준적 모형인 초자연수(hypernaturals)를 구성하고, 이것이 표준 산술 모형과 초등적으로 동등함을 보증하는 워시의 정리(Łoś’s theorem)를 증명한다.

1. 개괄

콤팩트성 정리에 의해 우리는 1차 논리가 유한과 무한을 구별하지 못함을 안다. 따라서 무한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자연수와 1차 논리적으로 구분 불가능한 모델을 정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봄직하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초자연수 $[0], [1], [2], \dots$를 정의하자.

\[\begin{aligned} [][0] &= (0, 0, 0, 0, 0, \dots) \\ [1] &= (1, 1, 1, 1, 1, \dots) \\ [2] &= (2, 2, 2, 2, 2, \dots) \end{aligned}\]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든 항이 0으로 차 있어야 $[0]$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엄격하다. 예를 들어 처음 두 개의 항만 1이고 나머지 항은 모두 0인 튜플 $(1, 1, 0, 0, 0, \dots)$ 또한 $[0]$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유한 개의 항을 제외한 모든 항이 $n$이라면 그 튜플 또한 $[n]$으로 간주하도록 하자. 즉,

\[[n] = \lbrace (x_1, x_2, x_3, \dots) \in \mathbb{N}^\omega : \lbrace i \in \mathbb{N}: x_i \neq n \rbrace \text{ is finite} \rbrace\]

하지만 이제 다음의 문제가 생긴다. 다음 튜플은 $[0]$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1]$로 간주해야 하는가?

\[(0, 1, 0, 1, 0, 1, \dots)\]

이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짝수 집합과 홀수 집합 중 하나를 임의로 채택할 것이다. 만약 짝수 집합을 채택했다면 위 튜플은 $[0]$이 되고(인덱스는 0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홀수 집합을 채택했다면 $[1]$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채택의 과정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만약 6의 배수의 집합이 채택되었다면, 3의 배수의 집합 또한 채택되어야 논리적으로 일관된다. 후자를 만족하는 튜플은 자명하게 전자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의 배수의 집합이 채택되었으므로, 3의 배수가 아닌 수의 집합은 기각되어야 한다. 자연수의 모든 부분집합에 대해 이같은 채택과 기각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은 초필터(ultrafilter)라고 불리는 구조와 상응될 것이다. 적절한 초필터가 주어지면 그것을 토대로 임의의 튜플을 초자연수에 대응시킬 수 있으며, 이 전체적인 과정을 초곱(ultraproduct)이라고 부른다.

2. 초필터의 정의

정의. $X$가 집합이라고 하자. $X$의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mathcal{F}$가 다음을 만족할 때, $X$의 필터라고 부른다.

  1. $X \in \mathcal{F}$
  2. $\varnothing \not\in \mathcal{F}$
  3. 상위집합 닫힘: $A \in \mathcal{F}, A \subset B \implies B \in \mathcal{F}$
  4. 유한 교집합 닫힘: $A, B \in \mathcal{F} \implies A \cap B \in \mathcal{F}$

직관적으로 필터는 “큰 집합들의 모임”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1번과 2번 공리는 전체집합은 크고 공집합은 작다는 자명한 원리를 진술한다. 3번 공리는 큰 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은 크다는 원리를, 4번 공리는 큰 집합끼리 유한 번 교집합을 해도 여전히 크다는 원리를 진술한다.

여담으로 필터는 초곱뿐 아니라 퍼지 논리(fuzzy logic)의 모형을 고전 논리의 모형으로 변환하는 데도 쓰인다. 이때 필터는 “큰 집합들의 모임”이 아닌 “참인 문장들의 모임”이 된다. 그리고 퍼지 논리에서 고전 논리로의 변환은 코헨의 강제법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하세 다이어그램(Hasse diagram)을 통해 필터를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색칠된 영역은 $X = \lbrace 0, 1, 2 \rbrace$의 필터이다. 하세 다이어그램을 $\varnothing$에서 $X$로 가는 물줄기의 흐름으로 이해하면, 특정 지점에 잉크를 떨어뜨렸을 때 그 잉크가 퍼져 나가는 영역은 필터를 이룬다.

2번 공리와 4번 공리에 의해, $A \in \mathcal{F}$라면 $A^c := X \setminus A \notin \mathcal{F}$이다. 이 사실을 강화하여, $X$의 모든 부분집합에 대해 그 집합 또는 여집합이 필터에 있을 것을 요구하면 초필터(ultrafilter)의 정의를 얻는다.

정의. $X$의 필터 $\mathcal{F}$가 다음을 만족할 때 $\mathcal{F}$는 초필터이다.

\[\forall A \in \mathcal{P}(X) : A \in \mathcal{F} \lor A^c \in \mathcal{F}\]

앞선 그림의 필터는 초필터이다. 초필터는 하세 다이어그램의 정확히 절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3. 무한집합에서의 초필터

최소(least) 원소를 가지는 필터를 주 필터(principal filter)라고 하며, 주 필터가 아닌 필터를 자유 필터(free filter)라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모든 필터는 주 필터로, “특정 지점에 떨어뜨린 잉크가 퍼져 나가는 영역”의 이미지와 완전히 부합한다.

주 필터와 달리 자유 필터는 직관적으로 포착하기 힘들다. 다음의 정리 때문이다.

정리. 유한집합 위의 필터는 모두 주 필터이다.

Proof. $A_0 \in \mathcal{F}$가 최소 원소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떤 $B \in \mathcal{F}$가 존재하여 $A_1 = A_0 \cap B \subsetneq A$이다. 즉, $|A_1| < |A_0 |$이다. $A_1$이 최소 원소라면 증명이 끝나고, 아니라면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주어진 집합의 크기가 유한하므로 이 과정은 계속 반복될 수 없으며, 최소 원소에 종착하게 된다. ■

위 정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자유 필터는 그 내부에 무한히 이어지지만 (따라서 유한 교집합만으로 최소 원소에 도달할 수 없다) 공집합에 도달하지는 않는 부분집합의 체인을 가지는 필터이다. 이에 따라 무한집합 위의 필터만이 자유 필터가 될 수 있다.

그 실례를 살펴보자.

정의. $X$가 무한집합이라고 하자. $A \subset X$가 여유한(cofinite)하다는 것은 $X \setminus A$가 유한집합인 것이다.

정리. $\mathbb{N}$의 모든 여유한 부분집합의 모임을 $\mathcal{F}$라고 하자. $\mathcal{F}$는 자유 필터이다.

증명은 연습문제로 남긴다. 위 정리의 $\mathcal{F}$를 프레셰 필터(Fréchet filter)라고 부른다. 일례로 10보다 큰 수들의 집합 $\lbrace 11, 12, 13, 14, \dots \rbrace$은 $\mathcal{F}$의 원소이지만, 짝수의 집합은 $\mathcal{F}$의 원소가 아니다.

프레셰 필터는 초필터가 아니다. 하지만 다음 정리에 의해 초필터로 확장할 수 있다.

정리. 모든 필터는 초필터로 확장될 수 있다.

Proof. $X$의 모든 필터들의 모임 $\Omega$에 포함 관계로 정의되는 순서를 주자. 이 순서 하에서 체인을 이루는 필터들의 합집합은 필터임을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초른의 보조정리에 의해 $\Omega$는 극대(maximal) 원소 $\mathcal{U}$를 가진다. 만약 $\mathcal{U}$가 초필터가 아니라면, 어떤 $A_0 \subset X$가 존재하여 $A_0, A_0^c \notin U$이다. 이제 다음과 같이 $\mathcal{V}$를 정의한다.

\[\mathcal{V} = \mathcal{U} \cup \lbrace A \subset X : A_0 \subset A \rbrace \cup \lbrace A_0 \cap U : U \in \mathcal{U} \rbrace\]

$\mathcal{V}$는 필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mathcal{U}$의 극대성에 위배된다. 따라서 $\mathcal{U}$는 초필터이다. ■

따라서 자연수 집합은 프레셰 필터로부터 확장되는 자유 초필터를 가진다. 이 필터를 프레셰 초필터라고 부르자.

4. 초자연수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프레셰 초필터를 비롯한 자유 초필터는 다음의 성질을 가진다.

  1. 모든 여유한 집합을 원소로 가진다.
  2. 유한집합은 원소로 가지지 않는다.
  3. $A \subset \mathbb{N}$일 때 $A$가 필터의 원소이거나 $A^c$가 필터의 원소이다.

위 세 성질 덕분에 프레셰 초필터는 서론에서 초곱의 기초적인 아이디어를 개괄했을 때 맞닥뜨렸던 모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초자연수를 정의할 수 있다.

$\mathcal{U}$가 자유 초필터라고 하자. $\mathbb{N}^\omega$ 위에 다음의 동치 관계를 정의한다.

\[(n_0, n_1, n_2, \dots) \sim (m_0, m_1, m_2, \dots) \iff \lbrace i \in \mathbb{N} : n_i = m_i \rbrace \in \mathcal{U}\]

이것이 동치 관계임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동치류를 취할 수 있다.

\[\mathbb{N}^* := \mathbb{N}^\omega/\sim\]

$\mathbb{N}^*$을 초자연수(hypernaturals)라고 한다. 초자연수의 정의가 동치류인 것은 서론에서 초자연수를 $[n]$으로 적은 이유이다. 이제 남은 것은 초자연수의 연산과 술어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다.

초자연수의 덧셈은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정의한다.

\[(n_0, n_1, \dots) + (m_0, m_1, \dots) = (n_0 + m_0, n_1 + m_1, \dots)\]

여기에는 한 가지 미묘한 문제가 있다. 초자연수의 정의가 동치류이기 때문에, 동치류의 어떤 원소를 택하더라도 위 덧셈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음을 보여야 한다. 즉,

\[\begin{gather} (n_0, n_1, \dots), (n_0', n_1', \dots) \in [n]\\ (m_0, m_1, \dots), (m_0', m_1', \dots) \in [m] \end{gather}\]

에 대해,

\[(n_0, n_1, \dots) + (m_0, m_1, \dots), (n_0', n_1', \dots) + (m_0', m_1', \dots) \in [n + m]\]

임을 보여야 한다. 다행히 이는 어렵지 않다.

곱셈과 역원 또한 비슷하게 정의하면 된다. 한편 $<$와 같은 이항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n_0, n_1, n_2, \dots) < (m_0, m_1, m_2, \dots) \iff \lbrace i \in \mathbb{N} : n_i < m_i \rbrace \in \mathcal{U}\]

이 정의는 자연스럽게 삼항, 사항 관계로 일반화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초자연수를 정의했다. 다음 글에서는 초자연수의 여러 비표준적인 특징과, 그런 비표준성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수와 자연수를 1차 논리로 구분할 수 없음을 보이는 워시의 정리를 살펴볼 것이다.

지시에 대하여 — 한정 기술구

철학
언어철학

4. 한정 기술구

이름과 달리 한정 기술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일차적인 질문은 과연 한정 기술구는 지시를 하느냐는 것이다. 프레게는 한정 기술구 또한 이름과 마찬가지로 뜻(한정 기술구의 내용)과 지시체(해당 내용을 유일하게 만족하는 대상)를 가진다고 봤지만, 러셀은 한정 기술구가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4.1. 러셀의 기술주의

러셀의 주장

러셀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는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정 기술구는 2차 술어와 의미론적으로 동등하다. 요컨데 술어 P를

P: 대상 → 진릿값

와 같은 함수로 생각할 수 있듯이, D가 한정 기술구일 때

D: (대상 → 진릿값) → 진릿값 (i.e. 술어 → 진릿값)

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현재 영국의 왕”은 찰스 3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닌, ”x는 남자이다”, “x는 영국인이다”, “x는 엘리자베스 2세의 아들이다” 등에 대해서는 참을 반환하고, “x는 여자이다”, “x는 미국인이다”, “x는 제임스 1세의 아들이다”에 대해서는 거짓을 반환하는 2차 술어이다.

러셀의 기술주의의 강점은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와 같이 지시체를 결여하는 한정 기술구가 어떻게 유의미한 문장에서 쓰일 수 있는지(프레게에 따르면 이 문장은 무의미하지만 러셀에 따르면 이 문장은 그저 거짓이다), 그리고 프레게의 퍼즐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러셀은 ‘이것’과 ‘나’를 제외한 모든 이름이 위장된 한정 기술구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언어의 의미론을 단순명료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지만 크립키의 양상 및 의미론적 논증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정 기술구는 지시하지 않는다”라는 러셀의 주장만 살펴 보기로 한다.

Remark. 하지만 러셀의 기술주의가 정말로 프레게의 퍼즐을 설명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술어에 대한 외연적 정의를 택할 경우,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정확히 같은 (2차) 술어가 되기 때문이다. 내포주의와 외연주의에 대한 콰인 등의 논변도 참고할 만하다.

스트로슨의 이론

다음 문장을 보자.

그 책상은 책에 덮여 있다. (The table is covered with books.)

이 문장은, 예컨데 화자가 방에 있고, 방에 책상이 딱 하나 있으며, 그 책상이 책에 덮여 있을 때 참인 듯하다. 그러나 러셀의 기술주의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책상이 하나보다 많으므로 문장은 거짓이다.

이에 대해 스트로슨은 한정 기술구가 진정으로 지시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 사용으로 사용되면, 한정 기술구는 기술의 내용을 만족하는 대상 중 해당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상을 지시한다. 반면 한정 기술구가 속성적 사용으로 사용될 때 기술구는 러셀의 이론처럼 작동한다.

도넬란의 이론

다음 문장을 보자.

마티니를 마시는 그 남자는 누구인가? (Who is the man drinking a martini?)

이 문장의 화자가 지시하려고 하는 남자가 사실은 마티니가 아닌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 하자. 이 경우 스트로슨에 따르면 “the man drinking a martini”는 지시적으로 사용될 수 없으며(해당 맥락에서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남자가 없으므로), 속성적으로 사용될 수도 없다(전 세계에서 현재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남자가 여러 명이므로).

따라서 도넬란은 한정 기술구가 그 기술적 내용을 만족하지 않는 대상 또한 지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한정 기술구로써 특정 대상을 지칭하려는 의도이다. 도넬란의 이론은 한정 기술구에 대한 험티덤티 문제로 빠지는 듯하며, 이를 의식한 도넬란은 그라이스식 의미 이론에 호소한다.

크립키의 이론

크립키는 우리가 “마티니를 마시는 그 남자는 누구인가?”와 같은 문장을 화용론적으로 이해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한정 기술구는 지시하지 않는다는 강한 러셀주의를 견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지시가 순전히 규약(convention —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일례로 크립키의 이름 이론은 이름 $N$이 주어졌을 때, 이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이 인과 이론으로 정확하게 특정된다. 그러나 이름에 대한 강한 규약주의가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이나 불순 지표사의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았을 때 크립키의 규약주의는 근거가 미약하며, 이에 따라 도넬란주의를 거부하는 크립키의 주장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

한정 기술구 v. 비한정 기술구

최근에는 한정 기술구(the F)와 비한정 기술구(a F)의 구분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둘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일로 드러났을 뿐더러, 둘을 문법적으로 구분하지 언어가 수많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정 기술구와 비한정 기술구의 구분이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이것은 한정 기술구가 지시를 하지 않는다는 러셀주의를 보강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비한정 기술구 또한 지시를 한다는 매우 논란적인 주장을 개진해야 할 것이다)

5. 지시 회의주의

기술주의, 밀주의, 그리고 지표사 이론들은 지시가 철학적으로 탐구할 만한 주제이며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지시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거나 공허한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지시 회의주의적” 입장들도 존재한다.

콰인의 회의주의

콰인은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통해 ‘가바가이’와 같은 지시 표현들이 불가해하다고 주장한다. 번역 불확정성 논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전에 쓴 바가 있으니 그쪽을 참고.

다수의 문제

다수의 문제는 지시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나는 ‘경복궁’으로 현재의 경복궁을 지시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경복궁의 기와가 불타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화재 사건 이후에도 나는 ’경복궁‘으로 (이제는 기와가 없는) 경복궁을 지시할 수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화재 사건 이전과 이후의 ‘경복궁’은 동일한 지시체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복궁이 얼마나 불타 없어져야 더이상 그것은 ‘경복궁’의 지시체가 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지시 표현이 지시체를 가진다는 일반적인 도식에 의혹을 제기한다.

데이비드슨의 참 이론

철학자들이 지시에 대한 이론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의미론을 세우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문장에 등장하는 각 표현의 지시체가 결정되어야 해당 문장의 진릿값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이것이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슨은 문장에 대한 참 이론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해당 언어의 의미론을 세울 수 있고, 이에 따라 지시 이론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참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이후 별개의 시리즈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지시에 대하여 — 특성 모델과 의도주의

철학
언어철학

3. 지표사

지표사란 ‘나’, ‘너’, ’여기‘, ’지금‘, ’그‘, ’이것‘, ’저것‘과 같은 표현을 일컫는다. 지표사는 ’나‘, ’너‘, ’여기‘, ’지금‘과 같이 맥락이 주어졌을 때 지시체가 비교적 분명한 순수 지표사와 ’그’, ‘이것’, ’저것’과 같이 지시체가 비교적 불분명한 불순 지표사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모든 학자가 이 구분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3.1. 순수 지표사

3.1.1. 기술주의는 순수 지표사를 적절히 설명하는가?

일면 기술주의는 ‘나’의 지시체가 “이 발화의 화자”라는 기술적 내용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순수 지표사를 적절히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 발화의 화자”가 기술구에 해당하는지 불분명하다. 보통 기술구는 순전히 그 내용만으로 해당하는 대상을 특정해 내며, 그렇기에 기술(description)이라고 불린다. 그런 점에서 “이 발화의 화자”는 일반적인 기술구로 보기에 문제가 있다.

일례로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난 당신 앞에 다음과 같은 쪽지가 있었다고 하자.

브렉시트를 시행한 영국의 전 총리 는 누구인가?

그럼 당신은 — 혼란스럽기야 하겠지만 — ‘보리스 존슨’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쪽지에 적힌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면 어떨까?

이 문장의 화자 는 누구인가?

위 쪽지만 가지고서는 이 문장의 화자 가 지시하는 바를 알 수 없다. 즉, 이 문장의 화자 는 의미론적 계층을 넘어, 언어의 구체적인 사용과 관련된 화용론적 계층에 호소한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 문제는, “이 발화의 화자”가 ‘나’의 의미일 경우 ‘나’의 사용과 관련하여 이상한 예측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앨리스와 밥이 ”나는 배고프다“라고 발화한 경우, 앨리스와 밥은 서로 다른 바를 주장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기술주의는 앨리스와 밥이 둘 다 ”이 발화의 화자는 배고프다“라는 동등한 내용을 주장했다는 예측을 내놓는다.

3.1.2. 라이헨바흐의 해결법: 사례 재귀성

라이헨바흐는 지표사가 사례 재귀적(token reflexive)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기술주의와 지표사 사이의 간극을 메꾸고자 했다. 즉, 앨리스가 2025년 1월 13일 오후 4시 53분 광화문에서 ”나는 배고프다“라고 발화했다면 이 문장에서 ‘나’와 결부되는 기술구는 2025년 1월 13일 오후 4시 53분 광화문에서 “나는 배고프다”라고 발화한 화자 이다.

3.1.3. 캐플런의 해결법: 특성 모델

캐플런은 라이헨바흐의 접근법을 밀주의적으로 변형시켰다. 캐플런은 두 가지 유형의 의미를 구분한다. 내용(content)는 우리가 지금까지 의미라고 불렀던 것으로, 밀주의자 캐플런에게 있어 이름의 내용은 그 지시체이다. 한편 특성(character)은 사용 규칙으로서, 주어진 맥락에서 표현의 내용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캐플런은 엄격한 의미에서 동명인 이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이름은 불변 특성(constant character)을 가진다. 예를 들어 ‘보리스 존슨ᵢ ’의 내용은 모든 맥락에서 보리스 존슨ᵢ을 지시체로 산출하라 이다.

반면 순수 지표사의 특성은 이 화자를 산출하라, 이 발화의 위치를 산출하라 등과 같다. 캐플런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가 어떻게 논리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나‘, ’지금‘, ’여기‘의 특성은 이 문장이 모든 맥락에서 참임을 보장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필연적이지 않은지(주어진 맥락에서 ’나‘, ’지금‘, ’여기‘를 그 내용으로 대치한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설명할 수 있으며, 앨리스와 밥의 사례 또한 해결한다.

Remark. 캐플런의 이론에 대한 유명한 반박으로 자동응답기 역설을 찾아보라.

3.1.4. 인과 이론과 특성 모델의 융합

인과 이론과 특성 모델은 밀주의 이론이라는 공통점을 갖기에 둘을 융합하여 이름에 대한 보다 정교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캐플런은 (1) 이름을 심적 현상으로 간주하며, (2) 이에 따라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3) 이름의 특성은 불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름을 심리 현상으로 보는 입장은 다소 부담스럽다. 대신 (1), (2), (3)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봄직하다.

  1. 이름은 언어적 현상이다.
  2.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이 존재한다.
  3. 이름의 특성은 그 이름의 담지자 집합 중, 현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most salient) 대상을 지시체로 산출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인과 이론적인 4번 논제를 추가한다.

  1. 이름의 담지자 집합은 그 이름가 결부되는 인과적 사슬 중 최초로 명명된 대상들의 집합이다.

이같은 인과 이론과 특성 모델의 융합은 매력적이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과 이론의 강점인 “이름의 전달만으로 피전달자가 이름으로 지시할 수 있게 되는 원리”를 완벽히 보존하지 못한다. (필자왈: 뭐 그렇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이론은 완벽한 거 같은데~)

3.2. 불순 지표사

‘그’, ‘그녀’와 같은 불순 지표사, 또는 ‘이것’, ‘저것’과 같은 ‘진정한 지표사’의 의미는 순수 지표사보다 더 불분명하다. 웨트스타인과 앨리슨 마운트는 불순 지표사가 지시하는 대상은 해당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대상이라는 노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무엇이 특정 대상을 ‘해당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상’으로 만드는가? 아무래도 화자 또는 청자의 관심이라고 보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다. 하지만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할까?

1. 마운트: 상호 두드러짐의 원리

주장. 마운트는 불순 지표사가 대상 $c$를 지시할 필요충분조건은 화자와 청자의 관심이 일치하며 둘에게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대상이 A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 이 견해는 화자와 청자의 관심이 갈라지는 경우, 또는 청자가 우연히 화자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을 경우 지표사의 지시는 실패한다는 반직관적인 결론을 함의한다.

2. 캐플런: 의도주의

주장. 캐플런은 불순 지표사가 대상 $c$를 지시할 필요충분조건은 화자가 $c$을 지시하고자 하는 겨냥 의도로 지표사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 화자의 겨냥 의도가 무한히 유연할 수 있는 경우 험티덤티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데 화자가 충분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화자는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을 가리키며 루돌프 카르납을 지시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또한 캐플런은 다음의 복잡한 험티덤티 사례를 제시한다.

한 철학 교사는 교탁 뒤에 루돌프 카르납의 사진을 걸어 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난꾸러기 학생이 교사 몰래 카르납의 사진을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으로 바꿨다.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교사는 학생들이 교실로 들어오자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저것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위 사례에서 교사는 ‘저것’이라는 지표사로 루돌프 카르납의 사진을 지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청자인 학생들은 이 의도를 잡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교사의 발화는 참인가 거짓인가?

강한 의도주의에 따르면 교사가 카르납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저것’이라고 발화했으므로 ‘저것’은 카르납을 지시하며, 따라서 교사의 발화는 참이다.

3. 그라이스식 의도주의

게일 스타인은 그라이스의 의미론을 의도주의에 접목시켜 캐플런의 딜레마에 대한 다른 해답을 제공한다. 지표사 $i$가 대상 $c$를 지시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 화자는 세 가지 의도를 가져야 한다. 화자는 1) $i$로 $c$를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져야 하고, 2) $i$로 청자에게 $c$를 지시체로 식별시키려는 의도를 가져야 하고, 3) 자신의 의도를 청자가 인식함으로써 청자에게 $c$를 지시치로 식별시키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

그라이스식 의도주의는 험티덤티 문제를 해소한다. 캐플런의 험티덤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스타인은 직접 지시와 간접 지시의 구분을 제시한다. 캐플런의 사례의 경우, 교사는 루돌프 카르납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이 의도는 자신의 뒤에 있는 그림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전자는 간접적 지시, 후자가 직접적 지시이다. 스타인은 간접적 지시체 직접적 지시체가 충돌할 경우 직접적 지시체가 우선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교사의 발언은 거짓이다.

4. 라이머식 의도주의

그라이스식 의도주의는 ’상대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 화자‘의 경우와 같이 충분히 이상한 믿음을 가진 화자의 경우 험티덤티 문제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에 대해 라이머는 의도주의에 제약을 가하기 위한 다른 전략을 택하는데, 그의 전략은 제스처 우선순위로 요약할 수 있다. 라이머의 제약된 의도주의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험티덤티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