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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에 대하여 — 한정 기술구

철학
언어철학

4. 한정 기술구

이름과 달리 한정 기술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일차적인 질문은 과연 한정 기술구는 지시를 하느냐는 것이다. 프레게는 한정 기술구 또한 이름과 마찬가지로 뜻(한정 기술구의 내용)과 지시체(해당 내용을 유일하게 만족하는 대상)를 가진다고 봤지만, 러셀은 한정 기술구가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4.1. 러셀의 기술주의

러셀의 주장

러셀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는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정 기술구는 2차 술어와 의미론적으로 동등하다. 요컨데 술어 P를

P: 대상 → 진릿값

와 같은 함수로 생각할 수 있듯이, D가 한정 기술구일 때

D: (대상 → 진릿값) → 진릿값 (i.e. 술어 → 진릿값)

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현재 영국의 왕”은 찰스 3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닌, ”x는 남자이다”, “x는 영국인이다”, “x는 엘리자베스 2세의 아들이다” 등에 대해서는 참을 반환하고, “x는 여자이다”, “x는 미국인이다”, “x는 제임스 1세의 아들이다”에 대해서는 거짓을 반환하는 2차 술어이다.

러셀의 기술주의의 강점은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와 같이 지시체를 결여하는 한정 기술구가 어떻게 유의미한 문장에서 쓰일 수 있는지(프레게에 따르면 이 문장은 무의미하지만 러셀에 따르면 이 문장은 그저 거짓이다), 그리고 프레게의 퍼즐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러셀은 ‘이것’과 ‘나’를 제외한 모든 이름이 위장된 한정 기술구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언어의 의미론을 단순명료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지만 크립키의 양상 및 의미론적 논증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정 기술구는 지시하지 않는다”라는 러셀의 주장만 살펴 보기로 한다.

Remark. 하지만 러셀의 기술주의가 정말로 프레게의 퍼즐을 설명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술어에 대한 외연적 정의를 택할 경우,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정확히 같은 (2차) 술어가 되기 때문이다. 내포주의와 외연주의에 대한 콰인 등의 논변도 참고할 만하다.

스트로슨의 이론

다음 문장을 보자.

그 책상은 책에 덮여 있다. (The table is covered with books.)

이 문장은, 예컨데 화자가 방에 있고, 방에 책상이 딱 하나 있으며, 그 책상이 책에 덮여 있을 때 참인 듯하다. 그러나 러셀의 기술주의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책상이 하나보다 많으므로 문장은 거짓이다.

이에 대해 스트로슨은 한정 기술구가 진정으로 지시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 사용으로 사용되면, 한정 기술구는 기술의 내용을 만족하는 대상 중 해당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상을 지시한다. 반면 한정 기술구가 속성적 사용으로 사용될 때 기술구는 러셀의 이론처럼 작동한다.

도넬란의 이론

다음 문장을 보자.

마티니를 마시는 그 남자는 누구인가? (Who is the man drinking a martini?)

이 문장의 화자가 지시하려고 하는 남자가 사실은 마티니가 아닌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 하자. 이 경우 스트로슨에 따르면 “the man drinking a martini”는 지시적으로 사용될 수 없으며(해당 맥락에서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남자가 없으므로), 속성적으로 사용될 수도 없다(전 세계에서 현재 마티니를 마시고 있는 남자가 여러 명이므로).

따라서 도넬란은 한정 기술구가 그 기술적 내용을 만족하지 않는 대상 또한 지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한정 기술구로써 특정 대상을 지칭하려는 의도이다. 도넬란의 이론은 한정 기술구에 대한 험티덤티 문제로 빠지는 듯하며, 이를 의식한 도넬란은 그라이스식 의미 이론에 호소한다.

크립키의 이론

크립키는 우리가 “마티니를 마시는 그 남자는 누구인가?”와 같은 문장을 화용론적으로 이해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한정 기술구는 지시하지 않는다는 강한 러셀주의를 견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지시가 순전히 규약(convention —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일례로 크립키의 이름 이론은 이름 $N$이 주어졌을 때, 이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이 인과 이론으로 정확하게 특정된다. 그러나 이름에 대한 강한 규약주의가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이나 불순 지표사의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았을 때 크립키의 규약주의는 근거가 미약하며, 이에 따라 도넬란주의를 거부하는 크립키의 주장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

한정 기술구 v. 비한정 기술구

최근에는 한정 기술구(the F)와 비한정 기술구(a F)의 구분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둘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일로 드러났을 뿐더러, 둘을 문법적으로 구분하지 언어가 수많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정 기술구와 비한정 기술구의 구분이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이것은 한정 기술구가 지시를 하지 않는다는 러셀주의를 보강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비한정 기술구 또한 지시를 한다는 매우 논란적인 주장을 개진해야 할 것이다)

5. 지시 회의주의

기술주의, 밀주의, 그리고 지표사 이론들은 지시가 철학적으로 탐구할 만한 주제이며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지시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거나 공허한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지시 회의주의적” 입장들도 존재한다.

콰인의 회의주의

콰인은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통해 ‘가바가이’와 같은 지시 표현들이 불가해하다고 주장한다. 번역 불확정성 논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전에 쓴 바가 있으니 그쪽을 참고.

다수의 문제

다수의 문제는 지시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나는 ‘경복궁’으로 현재의 경복궁을 지시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경복궁의 기와가 불타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자. 화재 사건 이후에도 나는 ’경복궁‘으로 (이제는 기와가 없는) 경복궁을 지시할 수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화재 사건 이전과 이후의 ‘경복궁’은 동일한 지시체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복궁이 얼마나 불타 없어져야 더이상 그것은 ‘경복궁’의 지시체가 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지시 표현이 지시체를 가진다는 일반적인 도식에 의혹을 제기한다.

데이비드슨의 참 이론

철학자들이 지시에 대한 이론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의미론을 세우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문장에 등장하는 각 표현의 지시체가 결정되어야 해당 문장의 진릿값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이것이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슨은 문장에 대한 참 이론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해당 언어의 의미론을 세울 수 있고, 이에 따라 지시 이론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참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이후 별개의 시리즈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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