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에 대하여 — 특성 모델과 의도주의
13 Jan 20253. 지표사
지표사란 ‘나’, ‘너’, ’여기‘, ’지금‘, ’그‘, ’이것‘, ’저것‘과 같은 표현을 일컫는다. 지표사는 ’나‘, ’너‘, ’여기‘, ’지금‘과 같이 맥락이 주어졌을 때 지시체가 비교적 분명한 순수 지표사와 ’그’, ‘이것’, ’저것’과 같이 지시체가 비교적 불분명한 불순 지표사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모든 학자가 이 구분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3.1. 순수 지표사
3.1.1. 기술주의는 순수 지표사를 적절히 설명하는가?
일면 기술주의는 ‘나’의 지시체가 “이 발화의 화자”라는 기술적 내용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순수 지표사를 적절히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 발화의 화자”가 기술구에 해당하는지 불분명하다. 보통 기술구는 순전히 그 내용만으로 해당하는 대상을 특정해 내며, 그렇기에 기술(description)이라고 불린다. 그런 점에서 “이 발화의 화자”는 일반적인 기술구로 보기에 문제가 있다.
일례로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난 당신 앞에 다음과 같은 쪽지가 있었다고 하자.
브렉시트를 시행한 영국의 전 총리 는 누구인가?
그럼 당신은 — 혼란스럽기야 하겠지만 — ‘보리스 존슨’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쪽지에 적힌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면 어떨까?
이 문장의 화자 는 누구인가?
위 쪽지만 가지고서는 이 문장의 화자 가 지시하는 바를 알 수 없다. 즉, 이 문장의 화자 는 의미론적 계층을 넘어, 언어의 구체적인 사용과 관련된 화용론적 계층에 호소한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 문제는, “이 발화의 화자”가 ‘나’의 의미일 경우 ‘나’의 사용과 관련하여 이상한 예측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앨리스와 밥이 ”나는 배고프다“라고 발화한 경우, 앨리스와 밥은 서로 다른 바를 주장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기술주의는 앨리스와 밥이 둘 다 ”이 발화의 화자는 배고프다“라는 동등한 내용을 주장했다는 예측을 내놓는다.
3.1.2. 라이헨바흐의 해결법: 사례 재귀성
라이헨바흐는 지표사가 사례 재귀적(token reflexive)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기술주의와 지표사 사이의 간극을 메꾸고자 했다. 즉, 앨리스가 2025년 1월 13일 오후 4시 53분 광화문에서 ”나는 배고프다“라고 발화했다면 이 문장에서 ‘나’와 결부되는 기술구는 2025년 1월 13일 오후 4시 53분 광화문에서 “나는 배고프다”라고 발화한 화자 이다.
3.1.3. 캐플런의 해결법: 특성 모델
캐플런은 라이헨바흐의 접근법을 밀주의적으로 변형시켰다. 캐플런은 두 가지 유형의 의미를 구분한다. 내용(content)는 우리가 지금까지 의미라고 불렀던 것으로, 밀주의자 캐플런에게 있어 이름의 내용은 그 지시체이다. 한편 특성(character)은 사용 규칙으로서, 주어진 맥락에서 표현의 내용이 무엇인지 결정한다.
캐플런은 엄격한 의미에서 동명인 이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이름은 불변 특성(constant character)을 가진다. 예를 들어 ‘보리스 존슨ᵢ ’의 내용은 모든 맥락에서 보리스 존슨ᵢ을 지시체로 산출하라 이다.
반면 순수 지표사의 특성은 이 화자를 산출하라, 이 발화의 위치를 산출하라 등과 같다. 캐플런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가 어떻게 논리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나‘, ’지금‘, ’여기‘의 특성은 이 문장이 모든 맥락에서 참임을 보장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필연적이지 않은지(주어진 맥락에서 ’나‘, ’지금‘, ’여기‘를 그 내용으로 대치한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설명할 수 있으며, 앨리스와 밥의 사례 또한 해결한다.
Remark. 캐플런의 이론에 대한 유명한 반박으로 자동응답기 역설을 찾아보라.
3.1.4. 인과 이론과 특성 모델의 융합
인과 이론과 특성 모델은 밀주의 이론이라는 공통점을 갖기에 둘을 융합하여 이름에 대한 보다 정교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캐플런은 (1) 이름을 심적 현상으로 간주하며, (2) 이에 따라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3) 이름의 특성은 불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름을 심리 현상으로 보는 입장은 다소 부담스럽다. 대신 (1), (2), (3)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봄직하다.
- 이름은 언어적 현상이다.
-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이 존재한다.
- 이름의 특성은 그 이름의 담지자 집합 중, 현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most salient) 대상을 지시체로 산출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인과 이론적인 4번 논제를 추가한다.
- 이름의 담지자 집합은 그 이름가 결부되는 인과적 사슬 중 최초로 명명된 대상들의 집합이다.
이같은 인과 이론과 특성 모델의 융합은 매력적이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과 이론의 강점인 “이름의 전달만으로 피전달자가 이름으로 지시할 수 있게 되는 원리”를 완벽히 보존하지 못한다. (필자왈: 뭐 그렇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이론은 완벽한 거 같은데~)
3.2. 불순 지표사
‘그’, ‘그녀’와 같은 불순 지표사, 또는 ‘이것’, ‘저것’과 같은 ‘진정한 지표사’의 의미는 순수 지표사보다 더 불분명하다. 웨트스타인과 앨리슨 마운트는 불순 지표사가 지시하는 대상은 해당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대상이라는 노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무엇이 특정 대상을 ‘해당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상’으로 만드는가? 아무래도 화자 또는 청자의 관심이라고 보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다. 하지만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할까?
1. 마운트: 상호 두드러짐의 원리
주장. 마운트는 불순 지표사가 대상 $c$를 지시할 필요충분조건은 화자와 청자의 관심이 일치하며 둘에게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대상이 A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 이 견해는 화자와 청자의 관심이 갈라지는 경우, 또는 청자가 우연히 화자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을 경우 지표사의 지시는 실패한다는 반직관적인 결론을 함의한다.
2. 캐플런: 의도주의
주장. 캐플런은 불순 지표사가 대상 $c$를 지시할 필요충분조건은 화자가 $c$을 지시하고자 하는 겨냥 의도로 지표사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 화자의 겨냥 의도가 무한히 유연할 수 있는 경우 험티덤티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데 화자가 충분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화자는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을 가리키며 루돌프 카르납을 지시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또한 캐플런은 다음의 복잡한 험티덤티 사례를 제시한다.
한 철학 교사는 교탁 뒤에 루돌프 카르납의 사진을 걸어 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난꾸러기 학생이 교사 몰래 카르납의 사진을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으로 바꿨다.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교사는 학생들이 교실로 들어오자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저것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위 사례에서 교사는 ‘저것’이라는 지표사로 루돌프 카르납의 사진을 지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청자인 학생들은 이 의도를 잡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교사의 발화는 참인가 거짓인가?
강한 의도주의에 따르면 교사가 카르납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저것’이라고 발화했으므로 ‘저것’은 카르납을 지시하며, 따라서 교사의 발화는 참이다.
3. 그라이스식 의도주의
게일 스타인은 그라이스의 의미론을 의도주의에 접목시켜 캐플런의 딜레마에 대한 다른 해답을 제공한다. 지표사 $i$가 대상 $c$를 지시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 화자는 세 가지 의도를 가져야 한다. 화자는 1) $i$로 $c$를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져야 하고, 2) $i$로 청자에게 $c$를 지시체로 식별시키려는 의도를 가져야 하고, 3) 자신의 의도를 청자가 인식함으로써 청자에게 $c$를 지시치로 식별시키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
그라이스식 의도주의는 험티덤티 문제를 해소한다. 캐플런의 험티덤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스타인은 직접 지시와 간접 지시의 구분을 제시한다. 캐플런의 사례의 경우, 교사는 루돌프 카르납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이 의도는 자신의 뒤에 있는 그림을 지시하려는 의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전자는 간접적 지시, 후자가 직접적 지시이다. 스타인은 간접적 지시체 직접적 지시체가 충돌할 경우 직접적 지시체가 우선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교사의 발언은 거짓이다.
4. 라이머식 의도주의
그라이스식 의도주의는 ’상대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 화자‘의 경우와 같이 충분히 이상한 믿음을 가진 화자의 경우 험티덤티 문제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에 대해 라이머는 의도주의에 제약을 가하기 위한 다른 전략을 택하는데, 그의 전략은 제스처 우선순위로 요약할 수 있다. 라이머의 제약된 의도주의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험티덤티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