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멘의 블로그 이데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지시에 대하여 — 기술주의와 인과 이론

철학
언어철학

해당 글은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지시 항목을 요약 및 정리한 글이다.

1. 서론

”저것은 금성이다“, “영국의 마지막 여왕은 엘리자베스 2세이다”에서 ‘저것‘, ’금성’, ’영국의 마지막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대상을 특정하여 지시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들 표현이 특정 대상을 지시하게 되는 구체적 원리는 철학적 의문으로 가득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질문은 여섯 가지이다.

  1. 지시의 주체: 화자인가 단어인가?
  2. 지시 표현의 의미: 기술구인가, 지시체인가, 그 외의 것인가?
  3. 지시의 메커니즘: 지시 표현은 어떻게 특정 인물/대상에 결부되는가?
  4. 지시 이론의 범위: 모든 지시 표현은 공통의 메커니즘을 가지는가?
  5. 지시의 사적성: 지시는 화자의 사적 특징(e.g. 심리 상태)에 얼마나 의존하는가?
  6. 지시 이론의 의의: 지시 관계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가? 철학적으로 유의미한가?

이 글에서 다루는 이론은 기술주의, 인과 이론, 특성 모델, 의도주의의 네 가지이며, 추가로 지시 회의주의를 짧게 다룬다.

  기술주의 인과 이론 특성 모델 의도주의
주체 화자 지시어 다원적 화자
의미 기술적 내용 지시체 특성과 내용  
메커니즘 단어는 구체적인 기술적 내용과 결부되어 그에 부합하는 대상을 지시한다. 단어는 지시체의 명명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과적 사슬과 결부되어 지시한다. 단어는 통상적 지시 규칙(특성)과 결부되어 대상(내용)을 지시한다. 단어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려는 의도와 결부되어 지시한다.
범위 넓음 좁음(이름) 보통 넓음
사적성 강한 사적성 약한 사적성 보통 사적성 강한~보통 사적성
학자 (프레게), 러셀, 스트로슨, 라이헨바흐 밀, 크립키, 캐플런 캐플런 캐플런, 그라이스, 라이머
강점 프레게의 퍼즐을 설명 크립키의 논증을 해결 순수지표사의 원리를 해명 불순지표사의 원리를 해명
단점 크립키의 양상 논증 및 의미론적 논증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의 문제 불순지표사에서 화자-청자 딜레마 발생 험티덤티 문제

2. 고유이름

2.1. 고유이름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

기술주의 논제.

  1. 고유이름 $n$은 특정 기술적 내용 $P$와 결부된다.
  2. $n$이 $P$와 결부되는 이유는 화자가 마음속에서 $n$을 $P$와 결부하기 때문이다.
  3. $P$를 만족하는 대상 $c$가 유일하게 존재할 때, $n$은 $c$를 지시한다.
  4. $n$의 의미와 $n$의 지시체는 구별되며, 전자가 후자를 결정한다.
  5. $n$의 의미는 $P$이다.

예를 들어 ‘금성‘이라는 이름에 “태양계의 두 번째 행성”이라는 기술적 내용을 결부하는 화자는, 해당 기술적 내용을 만족하는 대상이 유일하며 그 대상이 금성이기 때문에 ’금성‘을 사용하여 금성을 지시한다.

Remark.

  1. 기술적 내용은 기술구로 이해하는 것이 표준적이지만, 설(Searle) 등은 기술적 내용이 언어적으로 명시 가능한 것뿐 아니라 지각에 기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2. 기술적 내용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불변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후술하다시피 이것은 기술주의가 지표사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3. $n$의 의미는 대언적이다. 후술하다시피 이것은 기술주의가 양상 반론에 직면하는 원인이다.

  4. 1번, 3번, 4번, 5번 논제는 이름의 의미론 — 즉, 이름을 정의역으로 가지는 의미 함수 $M$의 공역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이론 — 을 제공하고, 2번 논제는 이름의 메타의미론 — 즉, 각 이름 $n$에 대해 사상 $n \mapsto M(n)$은 어떻게 정의되는지 설명하는 이론 — 을 제공한다.

논변 1. 여러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의 사례

A와 B가 ’보리스 존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사람을 아는 경우를 고려하자. 한 명은 A와 B의 직장 동료이고, 다른 한 명은 영국의 전 총리이다. A가 B에게 “보리스 존슨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말하자, B는 “어느 보리스 존슨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A는 “영국의 전 총리”라고 대답한다.

위 사례에서 ’보리스 존슨‘이 지시하는 바는 (1) 화자인 A에게 결정권이 있으며, 이 결정은 (2) 화자가 마음속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기술적 내용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논변 2. 프레게의 퍼즐

다음 예문을 보자.

  1.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2. 산타클로스는 북극에 산다.
  3. 프레드는 마크 트웨인이 미국인이었다고 믿지만 새뮤얼 클레먼스가 미국인이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1은 참이지만 선험적(a priori)이지 않다. 2는 무의미(nonsense)하지 않다. 3의 경우 프레드의 믿음은 정합적(consistent)이다.

만약 이름의 의미가 그 지시체라면 1은 자기동일성 법칙에 따라 선험적이어야 하고, 2는 지시체(의미)가 결여된 문장이므로 무의미해야 하고, 3의 경우 마크 트웨인과 새뮤얼 클래먼스의 의미가 같으므로 프레드의 믿음은 비정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술주의는 이름의 의미와 지시체를 구별함으로써 세 예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내놓는다.

반론 1. 양상 논증

만약 내가 ‘보리스 존슨’에 대해 “브렉시트를 시행한 영국의 전 총리”라는 기술구를 결부시킨다 해도 나는 아래 문장을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1. 보리스 존슨은 브렉시트를 시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의 의미가 기술구와 동등하다면 1은 2와 동치이다.

2. 다음이 사실일 수 있었다: 브렉시트를 시행한 영국의 전 총리는 브렉시트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2는 거짓이다. 따라서 이름의 의미는 기술적 내용이 아니다.

Remark. 이름의 의미가 대상(re)이 아닌 기술적 내용(dicto)이므로, 1 → 2는 De Dicto 치환이다. De Re 치환의 경우 1은 3이 된다.

3. 브렉시트를 시행한 영국의 전 총리가 $c$일 때, 다음이 사실일 수 있었다: $c$는 브렉시트를 시행하지 않았다.

2와 달리 3은 참으로 간주하는 데 문제가 없다.

Remark. 양상 논증에 대처하기 위해 기술주의자는 3번, 4번 논제를 수정하고 5번 논제를 기각할 수 있다.

  1. $P$를 만족하는 대상 $c$가 현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할 때, $n$은 $c$를 지시한다.

  2. $n$의 의미는 $n$의 지시체, 즉 $c$이다. (즉, $n$의 의미는 대물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된 기술주의는 프레게의 퍼즐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할 뿐더러, 다음의 의미론적 논증 또한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많은 이론이다.

반론 2. 의미론적 논증

의미론적 논증은 방금 제시한 수정 기술주의를 비롯, 기술주의에 속하는 일군의 이론을 반박하는 논증이다. 요지는, 많은 경우 화자가 이름 $n$에 결부하는 기술적 내용 $P$는 세계에서 특정 대상을 유일하게 집어내지 못하며(즉, 기술은 불충분하며), 애초에 기술적 내용은 지시에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기술적 내용이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크립키가 제시한 파인만-겔만 사고실험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파인만’이라는 이름에 결부하는 기술적 내용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정도이다. 이는 겔만 또한 해당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인만’이라는 이름으로 파인만을 성공적으로 지시하는 듯하다.

나아가 기술적 내용이 불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마찬가지로 크립키가 제시한 괴델-슈미트 사고실험을 보자. 크립키는 다음의 상황을 가정한다.

사실 산술의 불완전성을 처음 증명한 수학자는 괴델이 아닌 슈미트라는 무명의 수학자다. 그러나 증명을 발표하기 전, 슈미트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했고 그의 증명은 괴델의 손에 들어가 괴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괴상한 사고실험에 대해서는 자기보다 위대한 논리학자인 괴델을 시기했던 크립키의 분풀이라는 카더라가 전해진다)

만약 (P1) 위 가정이 사실이고, (P2) 기술주의가 올바르며, (P3) 대부분의 사람이 ’괴델‘이라는 이름에 결부하는 기술적 내용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처음 증명한 수학자“라면, (C) 대부분의 사람이 ’괴델‘이라는 이름으로 지시하는 대상은 괴델이 아닌 슈미트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반직관적이다. 따라서 기술주의는 올바르지 않다.

Remark. 의미론적 논증을 극복하기 위해기술주의자는 다음 두 노선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1. 이름에 결부되는 기술적 내용은 화자에게 개인적으로 이용 가능한 정보를 초월할 수 있다.

  2. 이름에 결부되는 기술적 내용으로 “나에게 이 이름을 전달해 준 사람이 그 이름으로 지시하고자 했던 사람”을 채택할 수 있다.

스트로슨은 1번 노선을 선택한다. 그에 따르면 화자는 이름과 결부되어야 하는 기술적 내용을 제시하는 작업을 타인에게 의존할 수 있다. 이 경우, ‘파인만’ 또는 ‘괴델’의 의미는 파인만 전문가, 또는 괴델 전문가가 각 이름에 결부하는 기술적 내용이다. 그러나 스트로슨주의는 화자의 지시 의도를, 실제로 이루어지는 지시와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반직관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2번 노선은 인과 이론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해당 이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2.2. 고유이름에 대한 밀주의 및 인과 이론

밀주의 논제. 고유이름의 의미는 곧 지시체이다.

“밀주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입장은 존 스튜어트 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주의 이론들은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와 같은 동일성 진술이 후험적이지만 필연적으로 참임을 함의한다.

Remark. 크립키는 선험적이지만 우연적으로 참인 문장 또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미터 원기의 길이는 1m이다”를 그 사례로 든다.

밀주의 논제는 이름에 대한 의미론을 제공한다. 이를 보충하는 대표적인 메타의미론으로 인과 이론이 있다.

인과 이론.

  1. 처음으로 대상 $c$를 이름 $n$으로 부르는 사건인 명명식이 있다.
  2. 명명식에 참여한 사람을 시초로 하여, $n$으로 $c$를 지시하는 화자는 의사소통을 통해 해당 용례를 다른 화자에게 전달한다. 이같은 용례의 전달은 이름의 인과적 사슬을 형성한다.
  3. 이름 $n$의 의미(지시체)는 $n$의 인과적 사슬의 시발점에 이루어진 명명식에서 명명된 대상이다.

인과 이론의 미묘한 문제 중 하나는 어떤 의사소통 전달이 인과적 사슬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지를 구별하는 문제이다. 일례로 내가 직장 동료에게 거만한 나의 고양이를 ’나폴레옹‘으로 불렀다고 해서 이 의사소통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인과적 사슬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는다(이름의 가식적 사용). 또한 마다가스카르 사례와 같이 이름의 지시체가 도중에 바뀌는 경우도 있다(이름의 혼동된 사용).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다.

2.3. 다수의 담지자가 있는 이름의 문제

앞선 ‘보리스 존슨‘의 사례와 같이 다수의 담지자가 있는 이름의 경우, 지시의 결정권은 화자에게 있는 듯하다. 이 사실은 고전적 기술주의의 경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트로슨주의와 인과 이론에게 이 문제는 골칫거리이다.

스트로슨주의의 경우 이름 $n$의 지시체는 전문가 집단에 의해 유일하게 결정되므로 최대 1개의 지시체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담지자가 있는 이름이 분명 가능하므로, 스트로슨주의는 이름을 더 세분화해서 생각해야 한다. 즉, 문자적으로 동등하지만($\ulcorner n_1 \urcorner = \ulcorner n_2 \urcorner$) 의미론적으로 다른($n_1 \mapsto c_1, n_2 \mapsto c_2, c_1 \neq c_2$) 이름들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화자가 $\ulcorner n_i \urcorner$를 발화할 때 $i$를 결정하는 원리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해당 원리가 화자의 내면 기술구일 수는 없는데, $\ulcorner n_i \urcorner$을 사용하여 $c_1$ 또는 $c_2$를 지시할 수 있으나 $c_1$과 $c_2$를 구별해 내는 데 충분한 지시적 내용을 갖추지 못한 화자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탤릭체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경우가 정말로 있나?

밀주의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캐플런은 이름을 심리 현상으로 간주한다. 즉, 이름 $n$은 문자적 내용 $\ulcorner n \urcorner$과, $\ulcorner n \urcorner$으로 $c$를 지시하려는 의도가 얽힌 심리 현상이며, 인과적 사슬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이 심리 현상이다. 이에 따르면 다수의 담지자를 가지는 이름은 $n_1 = (\ulcorner n \urcorner, c_1), n_2 = (\ulcorner n \urcorner, c_2)$과 같이 구별되는 이름이며, $n_1$과 $n_2$를 성공적으로 습득한 화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n_1$ 또는 $n_2$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캐플런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노선은 다수의 담지자 문제를 인과 이론과 지표사 이론의 혼합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 노선은 르카나티, 펠처, 래인스버리 등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다음 글에서 살펴 볼 지표사 이론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