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비트겐슈타인 역설은 기계주의 및 기능주의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07 Jul 2026초록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주의 역설에 따르면 ”화자 A는 기호 s로 의미 M을 의미한다“는 대응되는 사태를 결여한다. 크립키는 이 역설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해당 역설이 기능주의 및 기계주의에 가지는 함의를 짧게 언급하며 추후 별도의 논문으로 다루겠다고 예고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본 에세이에서는 해당 논점을 고찰한다. 구체적으로, “덧셈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계”가 정말로 덧셈을 수행하는지를 결정하는 사태가 없다는 크립키의 지적에 착안하여, ”덧셈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기계“가 알고보니 덧셈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태가 없음을 논증한다. 이후 논증에 대한 반박으로서 제시될 수 있을 더밋의 패턴 실재론을 검토하고, 패턴 실재론은 관찰자의 인식론적 특징에 의존적이기에 성공적인 반박이 되지 못함을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본 에세이는,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이 회의주의 역설로부터 언어의 공적성을 의미의 필요조건으로서 제시한 것에서 나아가, 회의주의 역설은 언어의 공적성이 언어의 충분조건이기까지 함을 — 즉, 개체들이 상호 작용의 망을 이루는 군집에는 언제나 적절한 의미론을 부여할 수 있음을 — 시사한다고 결론 내린다.
1. 크립키-비트겐슈타인 역설
1.1. 덧셈과 컷셈
언어 사용자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는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있다. 언어 사용자는 오직 유한한 학습 경험과 인식적 능력을 가지지만, 그로부터 단어가 사용될 수 있는 무한한 사례에 대해 올바르게 추론해야 한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이를 다음의 역설로 발전시킨다. 앨리스는 지금까지 50이 넘는 두 수의 덧셈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 앨리스에게 ’68 + 57’을 묻는다면 그는 어렵지 않게 ‘125’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 회의주의자가 다가오더니 ‘125’라는 앨리스의 답은 잘못되었으며, 올바른 답은 ‘5’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해 보자. 구체적으로, 회의주의자는 다음을 주장한다.
만약 앨리스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면, 앨리스는 ‘68 + 75’에 대해 ‘5’라고 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 적어도 회의주의자에 따르면 — 앨리스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는 덧셈이 아니라 컷셈quaddition(⨁)이기 때문이다. 컷셈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x \oplus y = \begin{cases} x + y &x, y < 50 \\ 5 &\text{otherwise} \end{cases}\]
물론 앨리스는 이에 반발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과거에 앨리스는 ‘+‘로 컷셈이 아닌 덧셈을 의미했음을 입증할 수 있을까? 문제의 가정으로 인해, 과거에 앨리스가 수행한 ‘+’의 계산 기록들로부터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입증’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이 문제가 인식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크립키가 묻는 것은, 앨리스의 심리 상태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관찰자라고 할지라도 앨리스가 ‘+’로 덧셈을 의미하는지, 혹은 덧셈과 충분히 많은 경우에 일치하는 비표준적인 연산을 의미하는지 구별할 수 있는가이다. 이런 점에서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주의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요점은 “앨리스가 ‘+’로 컷셈이 아닌 덧셈을 의미한다”에 대응하는 사태가 있는가이다.
회의주의자의 주장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회의주의자의 주장은 가정문이다. 회의주의자는 앨리스가 어떤 경우에서든 ’5’라고 답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만약 앨리스가 과거에 ‘+’에 부여하던 의미와 현재 ‘+’에 부여하는 의미가 일치한다면 ’5’라고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1 둘째, 회의주의자의 주장은 규범적이다. 회의주의자는 앨리스는 ‘5’라고 답할 것임이 아니라, ‘5’라고 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회의주의자는 만약 앨리스가 ’68 + 57’에 대해 ‘5’라고 대답했더라면 그 대답은 정당했을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회의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 또한 두 가지 특징을 갖춰야 한다. 첫째, 화자에 관한 어떠한 사실이, 해당 화자가 특정 기호를 특정 의미로 사용함을 구성하는지 설명해야 한다.2 이는 회의주의자의 주장에서 가정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필요하다. 둘째, 해당 사실이 어떠한 방식으로 화자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는 회의주의자의 결론이 규범적이기 때문에 필요하다.3
만약 회의주의자의 주장을 반박한 길이 없다면 이는 앨리스가 ‘+’로 덧셈을 의미하는지 컷셈을 의미하는지 구별하는 사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콰인의 “동일성 없이 개체 없음No entity without identity”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일반적으로 “화자 A는 기호 s로 의미 M을 의미한다”에 대응되는 사태가 없음을 시사한다.
1.2. 역설에 대한 예상 반론
일면 앨리스는 자신이 ‘+’로 의미하는 연산을 구체적으로 해명함으로써 회의주의자에게 반박할 수 있을 듯하다. 가령 앨리스는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 “나는 ‘x + y’를 x개의 대상과 y개의 대상을 한데 모아 세는 연산으로 의미했고, 지금도 그렇게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를 컷셈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이에 대해 또 한번 회의주의를 펼칠 수 있다. 그는 과거에 앨리스가 ‘모아 세다’로 셈이 아닌 켐quont — 묶음의 크기가 50 미만일 때는 세는 것이고 50을 초과할 때는 5라고 대답하는 것 — 을 의미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처럼 ‘+’에 부여하는 의미를 언어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는 해당 해명 또한 비표준적인 의미가 부여될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하므로 무한 퇴행에 빠진다.
따라서 회의주의 논증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더 정교한 논증이 필요하다. 이에 크립키는 행동주의와 성향적 분석dispositional analysis, 산술의 공리화, 기계주의, 심리주의 등을 검토하지만 모두 부적격하다고 결론 내린다. 대부분의 경우 그 이유는 의미의 규범성을 설명하는 특징을 가지지 못함에 있다.
크립키가 검토하는 반론 중 본 에세이의 관심이 되는 것은 기계주의이다. 기계주의적 반론의 요지는, 언어적 해명이나 성향적 분석과 같은 추상적인 설명에 급급하는 대신, 앨리스가 ‘+’로 의미하는 연산을 계산하는 물리적인 기계를 설계해 회의주의자에게 제시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 시도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어떻게 기계에 질의를 입력하고, 기계가 출력하는 답을 해석해야 하는지가 여전히 해명을 요하는 문제로 남는다. 일례로 덧셈을 수행하는 튜링 기계는 계산 결과를 0과 1의 나열로서 출력하는데, 이는 이진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기계의 출력값을 해석하는 올바른 방식이 퀴진법 — 110010을 선행하는 이진열은 이진법으로 해석하고, 그 이후부터는 5로 해석하는 것 — 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둘째, 물리적 기계는 오직 유한한 입력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적 기계는 앨리스보다 더 ‘유능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가령 튜링 기계가 입력받을 수 있는 값의 상한이 10억이라면, 회의주의자는 이 기계가 펏셈 — 10억까지는 덧셈을 수행하고 그 이후로는 5를 내놓는 연산 — 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물리적 기계를 구현하는 대신 추상적인 알고리즘을 제시한다면, 이는 다시 언어적 해명의 무한 회귀로 빠지는 것이다.
셋째, 기계는 오작동할 수 있다. 기어가 빠지거나 전선이 녹을 수도 있다. 따라서 기계에게 의미 해명의 책임을 완전 전임하여 “이 기계는 언제나 내가 의미하는 연산을 계산한다”라고 주장하기란 “총알을 무는biting the bullet”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기계는 오작동하지 않는 한 언제나 내가 의미하는 연산을 계산한다”라고 단순히 주장을 수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한정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기계의 정상 작동과 오작동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괴짜 설계자는 기어의 빠짐과 전선의 녹아내림을 통해 덧셈을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정상 작동과 오작동을 구별하는 기준은 설계자가 이 기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에 의존하는데, 이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1.3. 언어의 공적성
크립키의 독해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주의 역설에 대해 “회의주의적 해답”을 제시한다. 즉, 역설의 결론 — “앨리스는 ‘+’로 덧셈을 의미한다’“에 대응하는 사태는 없다 — 을 받아들이되, 의미 진술이 어째서 — “앨리스의 생각은 초록색이다”와 달리 —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는지를 해명하는 것이다. 해명의 요지는,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공동체에서 가지는 기능과 불가결하며, 따라서 의미에 대한 논의는 개별 화자 단위에서는 공허하지만 공동체 단위에서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적 해답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고려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이 우주에서 ‘+’ 기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앨리스뿐인 경우이다. 앨리스는 ‘+’에 대한 자신의 성향에 따라 ‘+’를 사용한다 (물론 이는 동어반복적인 진술이다). 이따금 앨리스는 ‘+’로 계산 실수를 할 것이고, 약물에 취해 있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를 컷셈과 같은 괴이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앨리스는 스스로 ‘+’를 정당한 규칙에 따라 사용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크립키-비트겐슈타인 역설에 따르면 앨리스의 믿음을 반증하는 사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앨리스의 ‘+’ 사용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둘째는 이 우주에서 ‘+’ 기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앨리스와 스미스 두 명인 경우이다. ‘+’에 대한 둘의 성향은 일치할 수도, 어긋날 수도 있다. 만약 ‘68 + 57’에 대해 앨리스는 ‘125’라고 대답하고 스미스는 ‘5’라고 대답했다면, 앨리스는 스미스가 ‘+’를 올바른 규칙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적은 스미스 또한 앨리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크립키-비트겐슈타인 역설에 따르면 둘 중 누구의 지적이 더 올바른지에 대응하는 사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둘의 ‘+’ 사용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마지막으로 이 우주에서 ‘+’ 기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초기에는 공동체와 상충하는 방식으로 ‘+’를 사용하는 화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화자는 언어 공동체에서 점차 사라질 것인데, ‘+’ 기호가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기능에 지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실용주의적 고려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의 기능 중 하나는 장부를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를 컷셈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장부를 비표준으로 관리할 것이고, 이는 ‘+’를 덧셈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의 사용을 더는 위임하지 않을 사유가 된다. 이렇듯 언어의 기능에 기반한 지속된 승인과 추방의 과정은 일관된 규칙을 따르는 화자들로만 구성된 공동체로 수렴한다. 그리하여 “앨리스는 ‘+’로 덧셈을 의미한다”는, 앨리스의 ‘+’ 사용을 언어 공동체가 승인한다는 표현으로서 유의미하다.
2. 기계주의에 대한 보론
On the other hand, I have resisted the temptation to discuss ‘functionalism’ explicitly, even though various forms of it have been so attractive to so many of the best recent writers that it has almost become the received philosophy ofmind in the USA. . . I cannot discuss functionalism at length here without straying from the main point. But I offer a brief hint. Functionalists are fond of comparing psychological states to the abstract states of a (Turing) machine. . . All regard psychology as given by a set of causal connections, analogous to the causal operation of a machine. But then the remarks of the text stand here as well: any concrete physical object can be viewed as an imperfect realization of many machine programs. Taking a human organism as a concrete object, what is to tell us which program he should be regarded as instantiating? In particular, does he compute ‘plus’ or ‘quus’? If the remarks on machines in my own (and Wittgenstein’s) text are understood, I think it will emerge that as far as the present problem is concerned, Wittgenstein would regard his remarks on machines as applicable to ‘functionalism’ as well.
I hope to elaborate on these remarks elsewhere.
2.1. 크립키의 주석
2.2. 색맹-반가산기 사고실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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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회의주의자의 주장이 전자에 해당했다면, 이는 “더 무거운 공이 더 빨리 떨어진다”라는 주장이 피사의 사탑 실험으로서 즉시 반박되듯이, 앨리스가 ‘5’가 아니라 ‘125’라고 말했다는 사실로서 즉시 반박되었을 것이다 (피사의 사탑 실험이 역사적 허구이긴 하나 좋은 예시라서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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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사의 사탑 예시를 들자면 이는 ‘더 무거운 공’이 어떤 사실로서 구성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양팔저울에 매달았을 때 기울어지는 쪽”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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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건은 논증에 핵심적이다. 가령 어떤 매드사이언티스트가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나는 과거에 앨리스를 원자 단위로 스캔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너의 말을 듣고 그 스캔본을 본따 만든 앨리스-2에게 ‘68 + 57’을 물어보았고, 앨리스-2는 ‘125’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과거의 앨리스는 ‘+’로 컷셈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반박하지 못한다. 해당 사실은 앨리스가 언제나 ‘125’라고 답했을 것임을 보증할 뿐 그가 언제나 ‘125’라고 답해야 했음은 보증하지 않는다.
이는 체계적 계산 오류의 사례를 통해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덧셈을 처음 배우는 아이는 종종 받아올림을 까먹곤 한다. 그런 아이는 ‘68 + 57’에 대해 ‘115’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모종의 문제로 인해 어른이 될 때까지 받아올림 실수를 교정하지 못한 존슨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존슨은 덧셈이 무엇인지 이해하며 구체적인 계산 문제가 아니라 덧셈에 대한 성질을 질문 받으면 올바르게 대답하지만, 교정자가 없는 상황에서 ‘68 + 57’을 질문 받으면 언제나 ‘115’라고 대답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존슨이 ‘+’에 덧셈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그 의미에 정당하게 ‘68 + 57’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바로 이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해 두 번째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의미론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존슨이 ‘+’에 텃셈 — 두 수의 덧셈을 받아올림을 제하고 수행하는 연산 — 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수긍해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