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멘의 블로그 이데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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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자연학 수업

목차

들어가며

1부. 존재

존재에 관한 질문들
유물론의 눈으로 본 물리학의 역사

들어가며

세계가 신비로 가득했던 때가 있습니다. 사냥꾼은 수풀을 가르는 바람의 흐름에서 정령의 목소리를 들었고, 양치기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과 은하수에서 신화를 읽었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하나의 작은 기적이라고 믿던 때가, 죽은 사람의 무덤 곁을 지키면 그의 영혼이 덜 외로울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생과 사, 계절의 변화와 천체의 운행, 만물의 기원과 우주의 원리는 깊은 비밀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밀秘密은 신비神秘의 원천이었습니다.

현대의 세계는 더이상 불가사의하지만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람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공기가 이동하는 현상이고, 별빛은 중력으로 응집된 기체 덩어리가 일으키는 핵융합임을 압니다. 생명의 탄생에 관해서는 시험관에서 태아를 수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고, 죽음은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생리 과정이 비가역적으로 중단하는 현상에 다름 아닙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소립자의 상호작용부터 은하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실로 대단한 양의 지식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자연의 횡포와 척박함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도리어 그 지식으로 환경을 개척하고 기술을 발명해 문명의 이기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거래처럼, 우리는 자연과학의 수혜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만 했습니다. 그 대가를 나열하자면 환경 문제, 빈부 격차, 기술윤리 문제 등 끝도 없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자주 간과될지언정 여타 못지않게 심대했던 상실 — 바로 신비의 상실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현대의 세계는 무미건조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전자와 쿼크 따위의 기본 입자뿐이지요. 우주는 입자의 사막입니다. 황홀경이니 사랑이니 하는 감정도 뉴런의 상호작용과 호르몬의 분비로 설명하면 그만입니다. 신비의 몰락으로 발생한 진공은 자본으로 발빠르게 채워졌습니다. 조명과 네온사인 때문에 밤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다면 스마트폰의 화면을 내려다 보면 됩니다. 숲이 있었던 곳에는 백화점이 들어섰고, 전설과 신화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인플루언서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최근 몇 세기에 맞이한 변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명을 계속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분명 자본의 엄청난 증식력과 흡입력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나쁜 변화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은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탁월한 원리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그것만으로 삶에서 충만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피부로 깨닫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사고방식. 출근의 고됨과 소비의 향유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일상. 무한한 방식으로 단조로운 콘텐츠. 쾌락주의, 물신주의, 허무주의…. 이 모든 것이 지겹다 못해 비극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신비가 자본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있어 신비는 그림의 여백이자 음악의 쉼표, 요컨대 그 부정성으로 인해 오히려 전체가 완전해지는 요소였습니다. 따라서 신비의 몰락은 인간이 세계로부터 유리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경과 권태를 가르는 것이 베일의 유무임에도, 세계는 너무나도 투명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신비는 우리의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팽창하는 지식의 구”라는 유명한 비유가 있습니다. 구의 내부는 지식을, 구의 표면은 무지를 나타냅니다. 구의 팽창은 표면적의 확대를 수반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축적은 우리의 무지에 대한 자각을 수반합니다.

대부분의 책, 영상, 강연의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의 내부에 초점을 맞춥니다. 수많은 현상을 일사천리로 설명하며 앎이 곧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제를 유감없이 입증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구의 표면입니다. 지식의 축적은 어떻게 우리의 무지를 더 깊은 단계로 유도했는지, 어떻게 세계를 더 깊은 베일 속으로 밀어 넣었는지 — 어떻게 세계는 오히려 더 신비로워졌는지가 제가 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새벽의 자연학 수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자연학’이라는 생소한 표현부터 설명해야겠네요. ‘자연학’이라는 표현은 기원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집필한 동명의 저술에서 유래합니다. 이 저술에서 그는 원인과 결과, 만물의 운행, 시간과 공간 등 자연의 삼라만상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개진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연학⟫을 두고 “서양의 사유를 직조해 낸 날실과 씨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과학혁명을 거치며 자연학은 물리학과 철학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자연학⟫의 라틴어 원제인 Physica가 물리학을 뜻하는 영어 Physics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새벽의 물리학 수업’이 아니라 ‘새벽의 자연학 수업’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현대의 물리학에서는 시들해지고 말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는 핵심이었던 특징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특징이란, 학문의 경계를 막론하고 다양한 관점과 이론을 동원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물리학 서적인 동시에 철학 서적이자 수학 서적입니다. 상대성 이론으로 쌍둥이 역설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시공간의 본질에 대해 시사하는 바를 고찰해볼 것입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순수수학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수학적 대상이 맺는 관계에 대해 함의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볼 것입니다. 어째서 수학은 물리학에 필수 불가결한지, 수학과 물리학의 경계는 어디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전례가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잘 성립된 이론들조차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세 학문이 맺는 불가사의한 관계가 이 책의 주제이므로, 어느 한 학문에 치중된 제목을 선택하기보다는 기원전으로 돌아가 ‘자연학’이라는 표현을 빌려오기를 선택했습니다.

한편 ‘새벽’이라는 수식어는 이 책의 자연학적 고찰의 지향점이 신비임을 의미합니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 걸친 시간이자 희미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간. 땅에서는 내밀한 감정이 자라나고 하늘에는 커튼이 쳐지는 시간.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새벽에 푸른색으로 물들어가는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길 때일 것입니다. 나라는 자아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우주는 어떻게 시작했으며 어떻게 끝날까. 신이나 사후 세계는 존재할까. 물론 다음 날 아침이면 내가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조차 새하얗게 잊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저는 한 개인이 세계에 마음을 열게 되는 새벽이라는 시간을 단순한 감성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수학, 물리학, 그리고 철학의 실타래에 신비 한 방울을 떨어뜨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 분이 잃어버린 신비에 대한 동경과, 세계와의 애틋한 관계를 다시 발견하시기를. 그로써 이 세계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특별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부. 존재

1장. 존재에 관한 질문들

무엇이 존재할까?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이 책의 서문만 보더라도 네 번이나 쓰였죠. 그러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깊게 고민해 볼수록, 이 단순한 두 글자에는 놀랍도록 기묘한 난제와 수수께끼의 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이 우리가 세계의 신비와 다시 조우하기 위한 첫 관문입니다.

우선 단순한 사실들부터 나열해 봅시다. 이 책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 분도 존재하지요. 아마 독자 분의 곁에는 책상, 의자, 머그잔, 조명, 스마트폰도 존재할 것입니다. 창밖으로는 조약돌과 나무, 벤치와 가로등이 존재하고, 하늘에는 태양과 달, 별, 은하가 존재합니다. 날개 달린 유니콘이나 불을 뿜는 용, 셜록 홈즈는 — 안타깝게도 —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여왕은 한때 존재했지만,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별 반박의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존재 여부가 모호한 대상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신, 영혼, 운명, 사후 세계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책의 도입부에서 벌써 이런 거창한 개념을 들고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일단 넘어갑시다. 종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존재 여부가 모호한 대상은 차고 넘치거든요.

수학적 대상의 문제

수학적 대상의 사례를 봅시다. 다음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아주 유명한 명제입니다.

임의의 두 점을 잇는 직선은 언제나 유일하게 존재한다.

대부분의 독자 분이 납득할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봅시다. 정말로 그러한 직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물리적인 세계에서 직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매끄러운 종이에, 가장 가는 펜으로, 가장 올곧은 자를 사용해서 직선을 그린다 한들 현미경을 통해서 보면 울퉁불퉁한 잉크 자국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직선의 수학적 정의가 양방향으로 한없이 뻗어 나가는 도형임을 고려하면 직선을 그리기란 원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례를 봅시다.

베르트랑-체비셰프 정리. $n$이 1보다 큰 자연수일 때, $n$과 $2n$ 사이에 적어도 하나의 소수가 존재한다.

이번에는 소수가 존재한다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표현은 직선이 존재한다는 표현보다도 이상합니다. 직선은 불완전하게나마 종이에 그려볼 수 있지만, 수는 그런 시도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조약돌이 3개 있는 그림이나 사람이 3명 있는 그림은 그릴 수 있어도, 자연수 3 자체는 그림으로 포착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음수, 무리수, 허수는 사과와 같은 상징물을 통해 표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죠. 직선과 소수의 사례 이외에도, 무한집합, 공집합, 4차원 공간, 무한 차원 공간, 디리클레 함수모든 점이 불연속인 함수, 칸토어 집합실수 집합과 크기가 같지만 길이가 0인 집합 등 고등 수학의 개념까지 고려하면, 이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매우 불분명해집니다.

심리적 현상의 문제

존재 여부가 모호한 또다른 유형은 심리적 현상입니다. 심리적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색깔입니다. 수풀의 초록색, 하늘의 파란색, 개나리의 노란색, 사과의 빨간색 — 이들 색깔은 존재하나요?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는 아무런 색도 가지지 않습니다. 전자와 원자핵은 무색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에너지 준위에 따라 그 전자가 흡수하고 방출할 수 있는 빛의 파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가령 사과 껍질은 파장이 650 nm인 빛만 반사하는 한편 레몬 껍질은 570 nm의 빛만 반사합니다. 그리고 빛의 파장대마다 자극하는 망막의 시각세포와, 그로 인해 활성화되는 시각 신경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전자는 빨간색으로 인식하는 한편 후자는 노란색으로 인식합니다.

요컨대 색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특정 파장대의 빛에 덧입히는 현상입니다. 색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이 마찬가지입니다. ‘달콤함’은 설탕 분자가 혀의 단맛 수용체를 자극할 때 특정 신경 회로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인한 현상입니다. ‘따뜻함’은 평균 운동 에너지가 0.025 eV 정도인 기체 분자들이 피부의 온점을 자극할 때 특정 신경 회로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인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직관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과 심리적 현상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은 시공간의 특정 위치를 점유하며, 보통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적 현상은 시공간의 특정 위치를 점유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죠. 이같은 간극을 무시하고 단순히 심리적 현상을 신경 회로의 활성화로 환원해버리는 설명들은, 마치 방청소하기가 귀찮아 바닥에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물건과 옷가지를 침대 밑으로 숨겨버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물리적 대상과 심리적 현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논의해 보겠습니다.

존재론과 유물론

지금까지 우리는 존재에 대한 짧은 탐구를 시도해 봤습니다. 존재에 대한 탐구를 존재론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계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는 어떤 원리를 통해 그 존재를 유지하는가? 모든 존재는 유형이 같은가? 또는 존재에 다양한 유형이 있는가? 존재의 기원은 무엇인가? — 이런 질문들이 존재론의 주제입니다.

존재론은 인류가 세계에 던진 최초의 철학적 질문이었습니다. 존재론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 탈레스가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고민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탈레스의 결론은 만물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물은 고체, 액체, 기체로 자유롭게 변할 수 있으며, 지구의 대부분이 바다라는 것이 주된 근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인류의 지성사는 탈레스의 추론으로부터 먼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물이 만물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물은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도 쪼갤 수 있습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전자와 쿼크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입자입니다. 전자와 쿼크 이외에도 기본 입자가 여럿 있는데, 총 17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표준 모형은 이들 17가지 기본 입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관한 이론으로, 일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 현대 물리학을 이루는 양대 산맥입니다.

표준 모형은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합니다. 바로 유물론입니다. 유물론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오직 물질뿐이라는 믿음 내지 이론입니다. 모든 것은 17가지의 기본 입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 신, 사후 세계와 같은 비물질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서 우리는 수학적 대상과 심리적 현상이 존재하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물론의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수학적 대상들은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허구입니다. 그 허구가 현실을 제법 잘 근사하기 때문에 수학은 자연과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학적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란, 화가가 현실과 분간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한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그 그림의 풍경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언어도단입니다.

또한 유물론은 심리적 현상을 물리학으로 환원합니다. 유물론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과 심리적 현상의 관계는 컴퓨터 회로와 컴퓨터 게임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컴퓨터 게임 속에서는 캐릭터가 아이템을 줍고, 레벨 업을 하고, 적을 무찌르는 등 다양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들 현상의 실체는 컴퓨터 회로에서 오가는 0과 1의 전기 신호에 불과하지요. 컴퓨터의 원리에 생소한 사람이라면 게임 속 다채로운 현상들이 0과 1의 신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 모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그다지 낯선 사실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물론은 심리적 현상이 물리학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우리의 시대정신

지금까지의 글을 읽은 독자 분이라면 유물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분은 유물론에 대한 설명을 읽고 “아, 난 유물론자야!”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유물론은 우리의 시대정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를 휘어잡는 특유한 사고방식, 즉 시대정신이 있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애니미즘, 토테미즘, 다신교, 유일신교, 절대왕정주의, 낭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시대정신의 자리를 찬탈하고, 새로운 사상에게 내주기를 반복했지요.

우리의 시대를 특징짓는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합리주의적 유물론일 것입니다. 이로부터 무신론,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 쾌락주의 등의 가치관이 파생되었지요. 여기서 합리주의라는 수식어는 우리가 유물론에 도달한 과정이 사회적 합의나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이론화를 통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화론을 믿는 이유는 창조론에 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비교해부학, 생물종 분포, 화석 등 수많은 근거가 진화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믿지 않는 이유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신경 세포의 다발에 지나지 않음을 뒷받침하는 증거, 이를테면 예쁜꼬마선충의 신경망을 그대로 로봇으로 재현해 보니 별다른 프로그래밍 없이도 실제 선충처럼 행동하더라는 사실 등이 버젓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근거의 뿌리에는 현대 물리학의 어마어마한 성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서 표준 모형이라는 이론을 짧게 소개드렸는데요, 과장을 살짝 보태 말하자면 표준 모형은 인류가 여태껏 떠올린 이론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론입니다. 물리학자들은 표준 모형을 검증하기 위해 입자가속기로 온갖 실험을 진행해 왔는데요, 이들 실험으로 밝혀진 표준 모형의 정확도는 지구에서 화성까지의 거리를 머리카락 한 올의 두께 이내의 오차로 예측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정확도 100%인 이론인 셈이죠. 상대성 이론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책의 후반부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 그것을 차치한다면 이 이론은 정말이지 신의 권능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저는 이같은 성공에 경도되어, 물리학으로부터 세계의 실체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유물론으로 도약하는 데는 의외로 논리적 구멍이 많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만 우리는 세계의 실체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다양한 관점을 통해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유물론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이 이어질 것입니다. 첫째로, 물리학의 역사를 훑어보며 유물론이 물리학과 항상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입니다. 둘째로, 물리학의 이론들은 수학적 대상의 독립적인 존재를 상정할 뿐 아니라, 수학적 대상들이야말로 이 우주의 실체일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알아볼 것입니다. 셋째로, 심리철학의 다양한 사고실험을 통해 심리적 현상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왜 문제적인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어때요, 재밌을 거 같지 않나요?

2장. 유물론의 눈으로 본 물리학의 역사

데카르트와 뉴턴

유물론은 매우 현대적인 생각인 듯하지만, 사실 그 역사는 지성사만큼이나 오래 되었습니다. 원자론을 제시한 데모크리토스 또한 유물론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죠. 17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의 물결이 일며 유물론을 사변적 이론으로서가 아닌 자연철학 및 자연과학과 결부되는 이론으로서 논의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입장 중 하나는 데카르트의 기계주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 — 물질과 독립적인 정신이 존재한다는 입장 — 과 유신론을 견지했기 때문에 유물론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과 신 이외에는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라 부를 만한 이론을 여럿 발전시켰습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세상을 이루는 것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가지는 알갱이들입니다. 그의 자연철학은 이 알갱이들이 어떻게 중력, 빛의 굴절, 생명의 성장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지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시를 위해 중력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을 봅시다. 데카르트는 온 우주가 투명한 물질, 이른바 에테르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물질들은 관성의 원리에 따라 직선으로 운동하려고 하지만, 온 공간이 에테르로 가득하기 때문에 에테르 알갱이들은 서로 충돌하며 복잡한 연쇄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 반응의 결과로서 에테르는 항성들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운동을 합니다. 왜 하필 항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용돌이 운동인지는 데카르트의 저술에 설명이 있지만 복잡하기도 하고, 중요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어쨌든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천체는 굴절하거나, 소용돌이에 완전히 포섭되어 항성을 공전하는 행성이 됩니다.

이 이론에서 주목할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특징은 온 세계가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는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신과 정신 이외의 자연에 관해서는 매우 철저한 유물론자였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의 우주는 신, 정신, 그리고 물질이라는 단 세 가지 유형의 대상만을 허용합니다. 그런데 진공은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입니다. 따라서 진공의 존재는 이 세상에 신, 정신, 그리고 물질뿐 아니라, 공간이라는 네 번째 대상의 존재를 시사하기 때문에 문제적입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토리첼리가 수은 기둥을 이용해 진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보였을 때에도 그것을 어떻게든 진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중력을 원격으로 매개되는 힘이 아닌 충돌의 연쇄 작용으로 인한 현상으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데카르트 직후 세대의 인물인 뉴턴의 입장과는 확연히 대비됩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르면, 거리 $r$만큼 떨어진 질량 $m_1$과 질량 $m_2$의 물체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힘이 작용합니다.

\[F = G \frac{m_1m_2}{r^2}\]

뉴턴은 이같은 힘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 또는 어떻게 두 물체가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라는 그의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뉴턴은 사변적 추론보다는 관측된 현상을 일률적으로 설명하는 방정식을 세우는 일을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후계자들은 이런 뉴턴의 태도를 학자로서의 책임 방기라고 비판하며, 만유인력의 정확한 메커니즘이 설명되지 않는 한 뉴턴의 이론은 임시방편용 가설에 불과하다고 공격했습니다.

현대에는 뉴턴의 이론이 상식이 되었기 때문에 이같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의 반박이 치졸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의견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냉철하게 보면 지구와 태양 사이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중력이 작용한다는 뉴턴의 주장은, 마치 실이 끊어진 실전화기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주장만큼이나 허무맹랑합니다. 게다가 뉴턴 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뉴턴은 동료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무 매개체 없이 중력이 작용한다는 가설이 “너무나 허황되어 학술적 탐구에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비록 만유인력 법칙으로부터 행성의 공전을 설명하는 뉴턴의 수학적 유도가 너무나 탄탄했기에 학계는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 뉴턴주의로 이동했지만, 자연에 대한 탐구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만유인력의 기이한 특징과 이에 대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의 공격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데카르트와 뉴턴의 충돌은 뉴턴 역학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유물론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뉴턴 역학은 진공과 만유인력을 상정하는데, 둘은 각각 빈 공간원격 힘이라는,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기학의 출범

뉴턴 이래 물리학은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업적만 살펴 볼게요.

첫 번째 업적은 전자기학입니다. 1861년에 맥스웰은 패러데이, 렌츠, 앙페르 등의 선행 연구를 종합하여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불리게 될 다음 네 개의 방정식을 발표했습니다. 맥스웰 방정식은 당대까지 알려진 전기력와 자기력의 성질을 모두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이었습니다.

\[\begin{align} &\nabla \cdot \mathbf{E} = \frac{\rho}{\epsilon_0} \\ &\nabla \cdot \mathbf{B} = 0 \\ &\nabla \times \mathbf{E} = -\frac{\partial \mathbf{B}}{\partial t}\\ &\nabla \times \mathbf{B} = \mu_0 \mathbf{J} + \mu_0\epsilon_0 \frac{\partial \mathbf{E}}{\partial t} \end{align}\]

두 번째 업적은 원자론입니다. 현대의 원자론은 1805년에 돌턴이 기체가 언제나 일정 성분비로 결합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했습니다. 돌턴에 따르면 원자는 쪼개질 수 없는 입자로, 전하를 가진 원자들이 전기력을 매개로 결합함으로써 만물이 구성됩니다.

19세기 후반에 맥스웰과 볼츠만은 원자론을 가정했을 때 기체의 온도는 기체 원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로 이해할 수 있음을 유도함으로써 통계역학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가설로서만 받아들여지던 원자론은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당대의 미해결 문제였던 브라운 운동 — 꽃가루가 정적인 수면 위에서 제멋대로 이동하는 현상 — 을 꽃가루와 물 분자의 충돌로 설명함으로써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최종적으로 19세기 물리학이 제시한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그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세기 유물론.

  1.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2. 원자는 질량을 가지며, 질량 사이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기술되는 중력이 작용한다.
  3. 원자는 전하를 가질 수 있으며, 전하 사이에는 맥스웰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전자기력이 작용한다.
  4. 온도와 압력 등의 거시 현상은 원자들의 미시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그림이고, 대부분의 실험 결과와도 일관적이었습니다. 때문에 19세기 말 학계에서는 물리학이 완성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분석하지 못한 결정체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현상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고, 물리학의 핵심은 거의 다 파악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장론의 발달

다만 찝찝한 점은 여전히 원격 힘의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종류가 중력에다가 전자기력까지, 두 가지로 늘어났죠. 사실 19세기에 이르러 어떻게 힘이 아무런 매개체 없이 전달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질문에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을 뿐더러, 그런 거 몰라도 자연 현상을 예측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그나마 이와 관련하여 있었던 진전은 장론의 발달이었습니다. 장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 우주는 field이라고 불리는, 데카르트의 에테르마냥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가 수영장이라면 장은 물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1 장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고전역학에서는 보통 전기장, 자기장, 그리고 중력장이라는 세 가지 유형을 상정합니다.

특정 성질을 가진 입자는 특정 장과 상호작용합니다. 전하를 가진 입자는 전기장과 상호작용하고, 질량을 가진 입자는 중력장과 상호작용하죠. 양전하와 전기장의 상호작용은 수영장의 펌프와 비슷합니다. 펌프가 물을 뿜어내는 것처럼 양전하는 주변의 전기장이 바깥 방향을 향하도록 만듭니다. 그 결과 다른 양전하를 밀어내지요. 반면 음전하는 하수구와 비슷하기 때문에 양전하를 끌어당깁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장론을 이용하면 계산이 수월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소개한 맥스웰 방정식도 장론의 언어로 쓰여 있어요.2 대강 설명드리자면 맥스웰의 세 번째 방정식은 변화하는 자기장이 전기장을 유도한다는 내용이고, 네 번째 방정식은 변화하는 전기장이 자기장을 유도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렇듯 장이 편리한 수학적 도구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냐는 별개의 문제이지요. 맥스웰을 비롯한 당대 대부분의 학자는 유물론을 근거로 전자기장을 그저 수학적 도구로 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도 관측된 바가 없는 개념을 물질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 동요를 일으키는 발견이 일어났습니다.

에테르 이론

앞서 전자기장을 수영장의 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조금 엉뚱한 예시이긴 한데, 수영장 바닥에 용수철을 고정시키고 추를 매단 뒤 눌렀다 뗐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면 추는 위아래로 진동하며 주위로 수중파를 일으킵니다.

비슷한 현상이 전기장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용수철 진자가 수중파를 일으키듯이, 진동하는 전하는 전기장의 요동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앞서 전기장의 변화는 자기장을 유도한다고 했죠. 이로 인해 진동하는 전하 주위로는 자기장이 유도됩니다. 그런데 전하의 운동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위아래로 계속 바뀌기 때문에, 전기장의 변화 방향과 그로부터 유도되는 자기장의 방향 또한 계속 바뀝니다. 그 결과 아래 그림과 같이 전기장과 자기장의 변화는 서로를 되먹이며 파동처럼 뻗어나가는데요, 이것을 전자기파라고 부릅니다.

맥스웰 방정식을 이용해서 열심히 계산해 보면 전자기파의 진행 속도는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습니다.

\[v = \frac{1}{\sqrt{\epsilon_0 \mu_0}}\]

흥미롭게도 위의 값은 상수입니다. 전하의 진동 속도와 세기는 전자기파의 진동수와 진폭에만 영향을 주지요. 그리고 위의 값을 계산해보면 299,792,458 m/s라는 수치가 나옵니다. 과학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주 익숙할 숫자인데요, 다름아닌 빛의 속도입니다! 당대에도 $\epsilon_0$, $\mu_0$, 그리고 빛의 속도의 대략적인 값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맥스웰 또한 이론적으로 유도한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해 보고는 그것이 빛의 속도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빛의 실체가 전자기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은 매우 이상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대에는 전자기장을 실재하는 대상이 아닌 수학적 도구로 보는 입장이 주됐습니다. 그런데 전자기장의 파동인 빛은 분명 실재하는 대상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전자기장도 빛만큼 실재하는 대상이거나, 빛이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맥스웰은 전자를 택했습니다. 맥스웰의 새 가설에 따르면 이 우주는 — 정말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 에테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하를 가진 입자는 맥스웰 방정식이 기술하는 대로 에테르와 상호작용하며, 이 상호작용을 우리는 전자기력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전하의 진동으로 인한 에테르의 파동이 전자기파, 달리 말해 빛입니다. 에테르를 물질로 볼지는 애매하지만 일단 그 질문은 차치해 두면, 에테르 이론이 함의한 유물론적 그림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에테르 이론의 유물론.

  1.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2. 빈 공간은 에테르로 가득 차 있다.
  3. 원자는 질량을 가지며, 질량 사이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기술되는 중력이 작용한다.
  4. 원자는 전하를 가질 수 있으며, 전하는 맥스웰 방정식이 기술하는 대로 에테르와 상호작용한다.
  5. 빛은 에테르의 파동이다.

에테르 이론의 검증 시도

맥스웰의 주장대로 빛이 에테르의 파동이라면, 빛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수영장의 사례로 돌아가 봅시다. 철수와 영희가 각각 1번과 3번 레인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 2번 레인에서는 물결이 일정 속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철수는 물결과 같은 방향으로 수영 중이고, 영희는 반대 방향으로 수영 중이에요. 이 경우 철수와 영희가 고개를 돌려 물결을 볼 때, 영희가 본 물결은 철수가 본 물결보다 더 빠르게 진행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영희 관점에서 물결의 상대 속도는 철수 관점에서의 상대 속도보다 큽니다.

마찬가지로 에테르 이론에 따르면 빛과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관측자가 측정한 빛의 속도는, 빛과 같은 방향으로 운동하는 관측자가 측정한 속도보다 큽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두 관측자가 측정한 빛의 속도가 다르다면 이 차이는 에테르의 존재에 대한 간접적 증거로 채택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빛의 속도는 말도 안 되게 빠르기 때문에, 실제로 이같은 방식으로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관측자의 운동 속도도 광속에 준하는 만큼 빨라야 합니다. 지구 위에서 실현하기에는 비현실적인 속도이죠.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바로 지구의 공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공전 속도는 약 3만 m/s로 어마어마하게 빠릅니다. 따라서 지표면을 기준으로 지구 공전 방향으로 쏜 빛과, 공전에 수직인 방향으로 쏜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유의미한 차이를 관측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볼 법하죠. 그렇다고는 해도, 지구의 공전 속도는 여전히 광속의 약 0.01%이기 때문에 이 차이를 관측하려면 상당히 정교한 장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마이컬슨이라는 물리학자는 간섭계라는 장치를 설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간섭계 안에는 빛을 쏘는 광원이 있습니다. 광원에서 나온 빛은 두 갈래로 나눠진 뒤, 서로 다른 경로를 왕복했다가 다시 한데 모아집니다. 모아진 빛은 배경 스크린을 향해 쏘아집니다. 만약 두 빛이 갈라진 이후에도 속도가 내내 같았다면, 다시 모아졌을 때 둘의 파형은 일치할 것이므로 스크린의 모든 곳에서 보강 간섭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속도가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스크린의 어떤 곳에서는 보강 간섭이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는 상쇄 간섭이 일어나, 전체적으로는 회절 무늬가 나타납니다. 비유하자면, 완전히 같은 박자로 박수를 치는 두 사람이 있으면 일정 주기로 큰 박수가 들리지만, 한 명이 다른 한 명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박수를 치면 박수 소리가 맞았다, 안 맞았다 하면서 어지러지는 것과 같습니다.

에테르 이론의 위기

마이컬슨 간섭계는 빛의 속도에서 지구의 공전 속도만큼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정밀했습니다. 신이 난 마이컬슨은 몰리라는 다른 물리학자와 함께 자신의 간섭계를 이용해서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하는 실험을 시행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아무리 실험을 해 보아도 나타나야 할 속도차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여 실험에 오류가 있었나 싶어 몇 번이고 재실험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어요.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 (1887) 빛은 관측자의 속도와 상관 없이 299,792,458 m/s의 일정한 속도로 관측된다.

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마이컬슨은 지구가 공전할 때, 지구 주변의 에테르가 지구에 이끌려 함께 움직인다는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구에 있는 관측자 기준으로 에테르는 정지해 있으므로, 공전 방향에 따른 광속의 차이가 생기지 않죠. 그러나 이 가설은 광행차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기각되었습니다.3

대신 로렌츠라는 물리학자가 아주 기묘한 가설을 새로 제시했는데요, 바로 에테르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는 물리적으로 수축한다는 가설이었습니다. 즉, 길이 $l$의 막대기가 에테르 속에서 움직이면 길이가 $l$보다 짧아집니다.

로렌츠의 이론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길이가 $l$인 막대기가 있습니다. 광속을 $c$라고 하면,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는 빛이 이 막대기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t_1 = l/c$입니다. 한편 앞서 말했듯이 지구가 에테르 속에서 속도 $v$로 움직인다면, 공전 방향으로 쏜 빛의 상대 속도는 원래 빛의 속도보다 느립니다. 가령 공전 방향으로 쏜 빛의 상대 속도가 $c/\gamma$라고 합시다 ($\gamma > 1$). 해당 빛이 막대기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t_2 = l\gamma/c$입니다. 즉, $t_1 < t_2$이며 이 시차가 마이컬슨 간섭계에서 간섭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로렌츠에 따르면 에테르 속에서 $v$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정확히 $1/\gamma$만큼 수축합니다. 즉, 막대기의 길이가 $l/\gamma$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전 방향으로 쏜 빛이 막대기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l \gamma / c \gamma = l/c$로, $t_1$과 정확히 같습니다! 즉, 빛의 상대 속도가 느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만큼 빛이 이동하는 거리 또한 수축했기에 시간차가 발생하지 않아 간섭이 없는 것입니다.

로렌츠의 이론은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잘 설명하기는 하지만, 찝찝한 구석이 있습니다. 에테르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가 왜 수축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면에서 로렌츠의 이론은 임시 방편용 가설ad hoc hypothesis의 성격이 다분했습니다. 하지만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로렌츠의 이론은 1905년에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허청의 한 서기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확기적인 발상을 통해, 로렌츠의 이론을 물리학의 기본 전제들로부터 수학적으로 유도해 낸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 <시간과 공간> 파트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다음 세 꼭지 정도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1. 단 두 가지 전제 — 모든 관성 좌표계의 물리 법칙은 동등하다는 전제와, 광속은 언제나 같다는 전제 — 로부터, 뉴턴 물리학과 맥스웰 방정식을 통합할 수 있다.
  2. 따라서 에테르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사라진다.
  3. 단, 시공간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완전히 달리해야 한다. 특히, 빠르게 움직일수록 공간은 수축하고 시간은 느려진다.4

입자-파동 이중성

그런데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빛은 무엇일까요?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한 가설을 또다른 논문에서 제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광전 효과는 금속에 빛을 쏘였을 때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입니다. 단, 빛의 진동수가 일정 문턱보다 낮아지면 빛에너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 전자가 방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빛의 진동수만 유지된다면 빛의 세기는 아무리 약해지더라도 전자가 계속 방출됩니다. 이는 빛이 파동이라는 기존의 이론과 충돌하는 결과였습니다. 파동의 에너지는 진동수뿐 아니라 진폭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빛이 에테르의 파동이 아니라 광자라는 알갱이들의 흐름이라는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주석

1. 수학적 용어가 익숙한 독자 분을 위해 첨언하자면, 고전적인 장은 벡터장이므로 장은 물보다는 각 지점에서 물이 흐르는 방향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다만 설명의 편의를 위해 조금의 부정확성을 감수하겠습니다.

2. 단, 맥스웰은 ‘장’이 아니라 ‘유도선line of induct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3. 광행차 현상은 밤하늘의 별이 1년을 주기로 작은 타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입니다. 이는 지구의 공전으로 인한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날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에서 본 빗줄기가 비스듬해 보이듯이, 공전 중인 지구에서 본 별빛은 실제 별빛의 위치에서 조금 기울어져 보여요. 특히, 봄에 지구의 공전 방향과 가을에 지구의 공전 방향은 반대이기 때문에 봄에는 별이 서쪽으로 기우는 한편 가을에는 동쪽으로 기웁니다. 그런데 만약 에테르가 지구와 함께 움직인다면 지구를 향해 도달하는 별빛도 지구의 속도에 맞춰질 것이므로 광행차 현상이 나타날 이유가 사라집니다. 비가 오는 날 바람이 자동차와 같은 속도로 불고 있다면 차 안에서 보았을 때 빗줄기는 똑바로 내리는 것처럼요. 따라서 마이컬슨의 가설은 광행차 현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4. 나중에 알아볼 이유로, ‘빠르게 움직일수록 공간은 수축하고 시간은 느려진다’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나쁜 설명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간결함을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