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검열 가설의 초월론적 성격에 관하여

철학
물리학

우주 검열 가설을 굉장히 간략히 소개하자면, “관측 가능한 우주는 인과율을 따른다”는 원리이다.

여기서의 관측 가능성은 상대론적 의미로, 시공간의 특정 지점에서 발신한 광신호가 충분한 시간 이후 관측될 수 있다면 그 지점은 관측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안드로메다 은하는 관측 가능하지만 — 안드로메다 은하와 지구의 거리는 250만 광년이므로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발신한 광신호는 250만 년 이후 관측될 것이다 —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내부는 관측 불가능하다. 사건의 지평선 내부에서 발신된 광신호는 특이점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문단의 소개가 “굉장히 간략한” 소개에 그치는 이유는, 관측 가능성과 인과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수학적/형식적으로 엄밀히 정의하는 것이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작업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Hawking, Ellis, Wald 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대충 다음과 같다. (안 읽어도 된다)

시공간 $(M, g)$에 대해, $\tilde M$ 안에 $\overline{J^-(\mathscr{I}^+) \cap M}$를 포함하는 열린 집합 $\tilde V$가 존재하고 $(\tilde V, \tilde g)$가 대역적 쌍곡이라면, $(M, g)$가 강하게 점근적 예측가능하다고 하자.

가설. 적절한 물질장(e.g. 무한한 에너지나 음의 에너지를 갖는 물질이 없다)을 가지며 특이점이 없고 점근적으로 평탄한 초기 데이터 $(Σ, h, K)$에 대해, 그 최대 코시 전개 $(M, g)$는 강하게 점근적 예측가능하다.

하지만 이 가설의 반례가 Christodoulou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결론: 우주 검열 가설은 틀렸다.

…로 논의가 끝났을 리는 없다. Christodoulou 자신을 비롯한 이후 물리학자들은 이 반례 우주가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충분한 안정성 조건을 추가한다면 우주 검열 가설을 성립시키는 것은 여전히 가능할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미래의 가능성을 그려 봄 직하다. 안정성 조건 A가 추가된 우주 검열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이후 어떤 물리학자가 A까지 만족하는 반례를 발견했다면 어떨까? 그제야 우주 검열 가설은 기각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 아마 안정성 조건 B가 추가된 우주 검열 가설이 새로 제시될 것이다. 그런데 B까지 만족하는 반례도 곧 발견된다면? 그러면 안정성 조건 C도 추가된 우주 검열 가설이 제시될 것이고, 어쩌고저쩌고…

분명 이것은 우리가 여타 과학 이론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다. 보통의 경우, 어떤 이론(e.g. 플로지스톤설)의 반례가 발견될 경우 초기에는 반례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이론이 완화/수정되지만(음의 플로지스톤), 반례가 너무 많이 쌓이면 기존의 이론은 기각되고 새로운 이론(산소설)이 채택된다.

그러나 우주 검열 가설의 경우에는 — 적어도 필자의 직관으로는 — 아무리 반례가 많이 등장하더라도 끊임없이 수정이 가해질지언정 결코 완전히 기각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만약 이 직관을 인정한다면, 우주 검열 가설의 문제는 더 이상 이 가설이 참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주 검열 가설은 선험적(a priori)으로 참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주 검열 가설은 인과율의 우주론적 형식화와 다름이 없으며, 인과율은 물리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 조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주 검열 가설이 참이 되도록 하는 조건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이 앞으로 발견될 반례에 대해 우주 검열 가설을 기각하기보다 우주 검열 가설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리라는 생각은, 마치 칸트주의자들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반례”에 대해 시공간의 선험적 직관 형식을 기각하기보다 이 직관 형식의 경직성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철학사와 과학사의 흥미로운 교차점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