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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외계인은 가능한가? 데카르트, 칸트, 프레게, 그리고 《논리철학논고》

철학
논리학
언어철학

이 글은 James Conant, The Search for Logically Alien Thought: Descartes, Kant, Frege, and the Tractatus (1991)를 정리한 것이다. 괄호 안의 내용은 필자가 보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뇌피셜이다).

초록

서양 철학사의 주요 논의 중 하나는 논리 법칙의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논리 법칙은 필연적으로 필연적인가, 혹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인가? 즉, 우리의 논리와는 상이한 논리 법칙을 가지는 세계, 또는 상이한 논리 법칙으로 사고하는 외계인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답변을 개괄하자면 이렇다.

  • 아퀴나스는 신 또한 논리 법칙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논리 법칙은 필연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이 진정으로 권능하다면 신은 논리 법칙 또한 바꿀 수 있어야 하며, 이에 따라 논리 법칙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 칸트는 논리 법칙을 이성적 사고의 초월적1 조건으로서 제시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입장을 극복했다.

  • 그러나 데카르트의 입장은, 논리 또한 인간 사고의 일부이므로 논리학은 심리학으로 환원된다는 심리학주의Psychologism로 살아남었다.

  • 프레게는 칸트의 입장을 빌려 심리학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했으나, 논리 법칙을 초월적 조건으로 보는 동시에 ‘자연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으로 보는 그의 입장은 내적 긴장을 일으켰다.

  •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법칙이 무의미Sinnlos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프레게의 내적 긴장의 원인은 “논리 법칙은 필연적으로 필연적인가?”라는 질문이 의미를 결여Unsinn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을 통해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가 형언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저술이라는 기존의 해석에 대항하여, 《논고》에는 아무런 철학적 주장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논고》의 최종 목표라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New Wittgenstein” 진영의 해석을 옹호한다.

1. 아퀴나스와 데카르트: 신은 논리에 종속되는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논리 법칙의 필연성 논의는 심각한 문제였다. 신의 권능과 논리 법칙의 필연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 가능possible absolutely과 절대적 불가능impossible absolutely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별을 제시했다. 절대적 가능은 지성체가 이해할 수 있는 사태를 의미하고, 절대적 불가능은 이해조차 불가능한 사태를 의미한다. 신의 권능이 뜻하는 바는 절대적으로 가능한 모든 일 — 이를테면 지구를 평평하게 만드는 일 — 은 신에게 가능하다는 것이며,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 — 이를테면 배중률을 위배하는 일 — 은 신의 권능을 논하는 데 무관하다는 것이 아퀴나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아퀴나스의 주장이 신성 모독적이라고 반박한다. 아퀴나스가 절대적 가능과 절대적 불가능을 구별할 때 근거로 삼은 “지성체”는 인간의 지성임이 암시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즉, 아퀴나스는 인간 지성의 한계 — 우리는 빨간색인 동시에 빨간색이 아닌 사과를 상상할 수 없다 — 와 신의 권능의 한계 — 따라서 신은 빨간색인 동시에 빨간색이 아닌 사과를 창조할 수 없다 — 를 동일시했다. 데카르트는 이것이 인간 지성의 월권이라고 비판한다. 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행할 수 있다. 그러한 신에게 논리 법칙은 자신의 의지대로 변경이 가능한 우연적 산물이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논리 법칙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가? 데카르트의 답변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이성이 논리 법칙을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이 이 세계를 특정 논리 법칙에 따라 창조했다면, 자애로운 신은 이 세계에 거주할 피조물인 인간에게 해당 논리 법칙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지성을 내려 줄 것이다 (이 대목을 데카르트의 유명한 악마 논변과 대조해 보라). 즉, 데카르트에 따르면 논리 법칙의 표면적 필연성은 (신이 내려 준) 이성의 설계에서 기원한다.2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신학적인 표현들을 신경생리학적 표현들로 대체하기만 하면, 논리 법칙의 표면적 필연성은 뇌의 작동에서 기원한다는 심리학주의의 주장을 얻는다.

그러나 데카르트주의에는 내적 모순이 있어 보인다. 데카르트는 다음의 세 명제를 동시에 주장하고자 한다.

① 인간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② 신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를 창조할 수 있다.

③ 인간은 ②의 진술을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참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①과 ③은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가 인간에게 이해 불가능한 개념이라면, 신이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진술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마치 연속체 가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연속체 가설이 참인 수학 체계가 가능하다’라는 진술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이 문제에 답할 필요를 느낀 데카르트는 이해comprehend와 직관apprehend의 미묘한 구별을 제시했다. 이해가 무언가를 이성 속에서 완전히 파악하는 일이라면, 직관은 이성이 무언가에 닿는 일이다.

나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이며, 불변하는 진리가 있으며, 신이 그것의 창조주임을 안다. 나는 내가 이것을 안다고 말하지, 내가 그것을 인식한다든가, 파악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기에 신을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지만, 신이 무한하며 전능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손이 산에 닿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두 팔로 산을 감쌀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③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이다.

③ 인간은 ②의 진술을 직관할 수 있으며 나아가 참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나중에 우리는 이와 같이, 엄밀히 따지자면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유효한 진리로 통하는 명제가 있음을 단어의 미묘한 구별 — 감히 말하자면 말장난 — 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서 다시 마주할 것이다.

2. 라이프니츠와 칸트: 자유, 이성, 논리

라이프니츠는 신이 논리 법칙을 임의로 창조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반대했다. 데카르트를 반박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신이 행하기 때문에 선한 일인가, 선한 일이기 때문이 신이 행하는 것인가?” 라는 스콜라 철학의 논쟁을 재등장시킨다. 라이프니츠는 후자를 주장한다. 신은 선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는 신이 ‘선’의 개념에 얽매여 있음을 시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은,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신이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선’의 개념은 신의 의지를 선행하지만, 신의 이성에는 포섭된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의지에 선행되는 ‘선’의 개념이 신의 자유에 반하기는커녕, 신의 자유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임을 강조한다. 만약 신의 의지에 선행되는 원리가 전무하다면, 신은 특정 행동을 행할 어떠한 근거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이 무언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무작위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작위적인 행동을 두고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중 슬릿을 통과하는 전자들이 자유의지에 의해 통과할 슬릿을 선택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유의지는 무작위랑 구별되기 위한 원리를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는 논리 법칙이 신의 이성에 포섭되어 있되 신의 의지에 선행하는 원리이자, 신의 자유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칸트로 계승된다. 데카르트가 논리 법칙을 이성의 산출물로서 보았다면, 칸트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뒤집는다. 칸트에 따르면 논리 법칙은 이성의 산출물이 아니라 이성의 구성 조건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이성이란 논리 법칙을 따르는 이성이다. 논리 법칙을 따르지 않는 이성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성이라 불릴 수 없다. (이는 마치 체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체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체스라 불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칸트의 논리철학에 대해 퍼트넘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칸트의 ⟪논리학 강의⟫는 오늘날의 우리가 ‘심리학주의’라고 부르는 입장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을 제시하는 선구적인 — 어쩌면 최초의 — 저술이다. […]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논리적인 생각은 엄격히 말해 애초에 생각이 아니라는 [칸트의] 반복적인 주장이다.

확실히 논리학에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가정이 없다. 규범적 의미에서의 생각, 즉 참 [또는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는 판단이 논리를 따른다는 것은 형이상학이 설명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를 전제한다. 칸트에게 있어 논리는 모든 이성적 활동에 선행한다.

특히 칸트는 논리가 심리학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경험적 사실들에 대한 학문으로서 심리학은 이성의 판단 활동을 통해 도달하는 이론인 반면, 논리학은 그러한 이성의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학을 심리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범주론적 오류이다. 여기서 칸트가 논하는 대상은 ‘인간 이성’이 아닌 이성 일반임에 주목하라.

그러나 칸트는 라이프니츠보다 더 엄격한 논리의 경계를 긋는다. 칸트에 따르면 논리학은 오직 문장의 순수 형식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배중률, 전건 긍정modus ponens, 대우법 등은 논리의 범주에 속하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집합론, 모델론, 양상 논리라고 부르는 것은 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논리학은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진술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무한 공리 — 적어도 하나의 무한집합이 존재한다는 공리 — 나 공집합 공리 — 공집합이 존재한다는 공리 — 와 같은 존재론적 진술을 포함하는 집합론과 달리, 칸트적인 의미의 논리학은 어떠한 존재론적 진술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논리학은 세계의 사태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므로, 논리학의 필연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나, 논리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통찰을 얻으려는 시도는 초험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영원의 불멸성에 관한 질문이나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만큼이나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그의 주장을 더 원초적인 층위로 옮기는 것을 볼 것이다. 요컨대 칸트가 논리학에 관한 철학적 혼란의 원인을 이성이 그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으로 진단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혼란의 원인이 이성이 부딪히고야 마는 한계가 있다는 환상 때문으로 진단한다.

3. 프레게: 논리적 외계인 사고실험

프레게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논리학이 이성의 산출물이 아니라 이성 — 인간 이성이 아닌 이성 일반 — 의 구성 조건임을 강조한다. 특히 프레게는 판단의 성립 요건으로서 그것이 참과 거짓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명제일 것을 주장한다. 판단의 성립 요건을 만족하지 않는 생각은 가짜 생각Scheingedanke이다. 이는 프레게가 논리 법칙으로 내세우는 — 칸트의 경우 유일한 논리 법칙으로 내세우는 — 배중률의 요구이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프레게는 당대에 유행하던 심리학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프레게는 심리학주의가 원인의 질문과 정당화의 질문을 혼동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뇌에 대한 심리적, 생리학적 연구는 우리가 어째서 논리 법칙을 절대적 참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이 어째서 논리 법칙이 절대적으로 참인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 법칙의 정당성은 심리학을 선행한다.

프레게의 논변은 우리가 약한 심리학주의 — 논리 법칙의 절대적 지위를 인정하는 한편 논리학을 심리학으로 환원하려는 입장 — 라고 부를 수 있을 입장을 성공적으로 반박한다. 그러나 강한 심리학주의 — 논리 법칙의 절대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심리학만으로 논리학을 환원하려는 입장 — 를 반박하는 데는 아직 부족하다. 강한 심리학주의자는 논리 법칙의 절대성에 관한 질문을 무의미한 질문, 마치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 치부할 수 있다.

프레게의 논리적 외계인 사고실험은 강한 심리학주의의 생각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음을 지적한다. 강한 심리학주의에 따르면 우리와 다른 뇌 구조를 가지고 있어, 우리의 논리 법칙과 모순되는 논리 법칙을 절대적인 참으로 생각하는 외계인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러한 외계인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이 상황에서 프레게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외계인의 논리 법칙과 우리의 논리 법칙 중 무엇이 올바른가?

이 기점에서 사고실험은 두 가지 갈림길로 나눠진다. 첫째 갈림길은 심리학주의자가 프레게의 질문을 유의미한 질문으로 인정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심리학주의자는 외계인의 논리 법칙과 우리의 논리 법칙 둘 다를 선행하여, 둘 중 어떤 법칙이 올바른지를 따질 수 있는 논리 체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외계인과 우리 중 누가 올바른가?”라는 질문은 외계인-심리학에도, 인간-심리학에도 속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학을 초월해 있으며, 이 질문의 유의미성에 대한 인정 자체가 심리학을 초월해 있는 논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상위 논리에 견주었을 때, 외계인의 논리는 다른 논리가 아니라 틀린 논리임이, 즉 애초에 논리가 아님이 드러난다.

(여기서 혹자는 우리의 논리가 틀린 것일수도 있지 않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 외계인 사고실험 자체가, 나아가 우리의 모든 이성이 넌센스의 구렁으로 빠져버린다. 논리에 대한 회의주의는 그러한 회의주의를 품게 만든 논증 또한 비논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철학적 탐구의 가능성을 완전히 함몰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논리를 옳은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후술할 프레게의 내적 긴장의 원인이 된다.)

둘째 갈림길은 심리학주의자가 프레게의 질문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심리학주의자는 어느 누구의 논리 법칙도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외계인의 논리 법칙은 외계인에게 올바르고, 인간의 논리 법칙은 인간에게 올바르며, 그 이상 주장할 것은 없다. 그러나 프레게는 이러한 심리학주의자의 태도가 심리학주의자가 견지하고자 하는 입장 — 즉, 우리와 다른 논리 법칙으로 사고하는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 — 을 불가해한 입장으로 만들어버림을 지적한다.

프레게의 지적에서 핵심적인 것은, “A와 B는 논리적으로 다르다”라는 명제가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A와 B의 동일성을 판별할 수 있는 논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논리학이 아닌 위상수학으로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구와 도넛3위상수학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구와 도넛에 대해 공통적으로 유효한 위상수학적 개념 — 이를테면 구멍의 개수4 — 이 존재하여, 구와 토러스가 그 개념에 대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와 논리적으로 다른 외계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심리학주의자의 주장은 그 자체로 우리의 논리학과 외계인의 논리학의 다름을 성립시키는 배경 논리를 전제하며, 이 경우 우리는 다시 첫째 갈림길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심리학주의자가 주장하는 바가 우리와 그저 다른 발화를 하는 외계인의 존재라면, 여기서의 차이는 두 소의 울음소리가 다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와 다른 논리로 사고하는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심리학주의의 주장은, 실상 그 외계인은 애초에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 을 드러낼 뿐이다. (소와 인간은 둘 다 소리를 내지만 오직 후자만이 사고를 한다. 빙고 머신과 계산기는 둘 다 숫자를 출력하지만 오직 후자만이 계산을 한다.)

4. 프레게 논리철학의 내적 긴장

지금까지의 논증을 보았을 때 프레게가 내리는 결론은 “논리적 외계인은 존재할 수 없다”인 듯하다. 정말로 이것이 논증의 결론이라면, 우리의 사고는 다음의 과정을 따랐을 것이다.

  1. 우리는 논리적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상정했다.
  2. 해당 존재가 가질 특징에 대해 고려했다.
  3. 이 특징들이 논리의 특성과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4. 따라서 우리는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을 기각한다.

그러나 — 적어도 프레게 본인이 제시하는 “판단의 성립 요건”에 따르면 — 여기서 우리가 겪는 것은 생각의 환영이 아닌가? 프레게의 논증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논리적 외계인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존재할 수 없다”가 아니라 “논리적 외계인의 상정 자체가 불가해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논리적 외계인의 상정은 우리의 사고를 논리의 범위 밖으로 위치시켜버림으로써, 우리의 사고를 사고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트로이 목마인 것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논리적 외계인에 대한 사고실험 자체가 일종의 가짜 생각Scheingedanke이라는 것이다. “논리적 외계인은 가능하다”는 심리학주의의 주장은 의미를 결여한 문장이다. 그것은 “참 또는 거짓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명제일 것”이라는 판단의 성립 요건을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논리적 외계인이 불가능하다”는 우리의 주장 또한 의미를 결여한다는 것이다.5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논리적 외계인이 불가능하다”는 문장에는 무언가 참인 진술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논리의 본성에 관한 어떤 진리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단지 우리 언어의 논리적 구조가 그 진리의 발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논고》는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특히 해커Hacker, 기치Geach 등의 학자는 《논고》가 반구문론적 명제countersyntactic proposition를 통해 “엄밀한 의미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저술이라고 해석해 왔다. 여기서 반구문론적 명제란, 언어의 자연적 구문론은 따르되 — 이를테면 주어는 서술어를 선행해야 한다 — 어느 시점에서 논리적 구문론을 위배하는 명제이다 — 이를테면 서로 다른 위계에 있는 유형론적 대상들을 같은 술어에 양화시킨다. 예를 들어 대상object과 개념concept의 구분은 엄격한 논리적 언어에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은 유형론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상과 개념의 구분은 ‘개념’을 대상화함으로써, 러셀의 역설과 같은 유형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럼에도 이 구분은 논리의 중요한 특성을 담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논고》 또한 이러한 반구문론적 명제들 — 엄밀히 말해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한 진리를 담지하는 명제들 — 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다리를 걷어차야 한다”는 《논고》의 최종적인 메시지는 그 명제들의 반구문론적 특징을 폭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논문의 저자는 이러한 전통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한다. 전통적 해석은 데카르트의 ‘이해’와 ‘파악’의 구분과 같은, 말장난에 불과한 허황된 구분들 — “엄밀히 말해 생각”과 “생각”, “그저 무의미”와 “깊은 무의미”, “사실”과 “사실” — 을 통해 《논고》의 내적 긴장을 해소하는 시늉을 했을 뿐, 실질적으로 그 긴장을 해소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전통적 해석은 이들 구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논리적 규칙을 위배하는 문장이 “무의미”하지만 “그저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생각은 결코 비논리적일 수 없다(§3.03)”는 《논고》의 구절을 인정하면서도 비논리적인 “생각”이 가능한지를 명료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논문의 저자는 전통적 해석과 단절된 새 해석을 제시한다. 그것은 소위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으로 일컬어지는 해석의 일환이다.

2편에서 계속


1. 이런 걸 신경 쓰는 독자라면, 필자는 ‘a priori’를 ‘선험적’, ‘transzendent’를 ‘초험적’, ‘transzendental’을 ‘초월적’이라고 번역한 아카넷 칸트전집의 용어를 사용한다.

2. 데카르트의 주장은 묘하게 칸트적이다. 실제로 윌슨Margaret Wilson은 논리 법칙에 대한 데카르트의 입장을 칸트의 초월철학과 현대의 자연주의의 시조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후 드러나듯이, 논리 법칙에 대한 데카르트의 입장과 칸트의 입장에는 간과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3. 엄밀히는 토러스. 토러스는 도넛의 겉면이다.

4. 엄밀히는 1차 호몰로지 군. 구의 경우 이는 $\mathbb{Z}$이고 토러스의 경우 $\mathbb{Z} \times \mathbb{Z}$이다.

5. 원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If we take the sentences “illogical thought is impossible” or “we cannot think illogically” to indeed present us with thoughts (with senses which we can affirm the truth of), then we concede what a moment ago we wished to deny (namely, that the negation of these sentences preseunt us with a genuine content, one which is able to stand up to the demand for judgment). But if we conclude that these words (which we want to utter in response to the psychologicstic logician) do not express a thought with a sense, then aren’t we, if we judge psychologism to be false, equally victims of an illusion of judgment? This is the problem at the heart of the onion.

즉, 논문의 저자는 다음의 문장이 실제로는 생각thought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1. 비논리적인 생각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논리식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not\exists x (I(x) \land T(x))$

이제 이를 다음의 문장과 대조해 보자.

  1. 초록색 생각은 불가능하다.
  2. $\not\exists x (G(x) \land T(x))$

(1)과 (3)은 형태론적으로 같은 문장이다. 그런데 (3)은 의미가 있는 문장으로 보인다. 그 의미란, 이 세상에 초록색이면서 생각이기도 한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자라면 (3)이 반증 가능성 원리 또한 통과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요컨대 세상의 모든 초록색 대상 중 생각에 해당하는 것이 발견되면 (3)은 기각된다는 것이다. 또한 (3)의 논리적 표현인 (4)는 어떠한 논리적 규칙도 위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1)과 (2)가 유의미하다는 생각은, 프레게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각의 환영”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 입장을 논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4)에서 등장하는 무제약적 양화사 $\exists x$의 부당함을 피력하는 것이다. $x$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내 앞의 사과가 $x$에 양화될 수 있다면, 사과의 꼭지 또한 $x$에 양화될 수 있는가? 무언가가 — 이를테면 나뭇잎 — 대상의 부분이 아니라 독립적인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반대로, 무언가가 — 이를테면 나무 — 대상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독립적인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수학적 플라톤주의를 인정하여 ‘자연수 집합’ 또한 양화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하는가? ‘신’ 또한 양화의 대상인가?

이렇듯 무제약적 양화사는 사용자로 하여금 강한 존재론적 개입을 요구한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피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제약적 존재 양화를 사용하는 대신 $x$를 $T$의 진리집합으로 양화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4)를 (5)와 같이 수정하는 것이다.

  1. $\exists x \in \mathrm{Th}\; G(x)$

여기서 $\mathrm{Th}$는 생각들의 집합이다. 그런데 이렇게 적고 나면, (5)는 적형식이 아니게 된다. 문제는 $G$를 정의하는 데 있다. 우리가 무제약적 양화를 피하고자 한다면, $G$의 정의역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무제약적 양화를 피해야 한다. 즉 a는 가능하지만 b는 불가능하다.

    a) G: 물리적 대상 → {T, F} (O)

    b) G: 모든 대상 → {T, F} (X)

따라서 (5)는 적형식이 아니다. (5)는 정의역에 속하지 않는 대상을 술어에 적용하고 있으므로 논리적 규칙을 위배한 것이다. 다시 말해, (5)는 의미를 결여한 문장이다.

이는 다음의 수학적 예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독자 분은 $0 < i$가 올바르지 않은 부등식임을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당 맥락에서 $<$는 실수 위에서만 정의되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 실수 위에서만 정의 가능한 이유는 실수, 허수, 그리고 $<$가 요구하는 논리적 규칙들과 연관한다. $<$의 규칙에 따르면, 양변에 0보다 큰 수를 곱하면 부등호의 방향이 유지되고, 0보다 작은 수를 곱하면 부등호의 방향이 뒤집힌다. 그런데 만약 $0 < i$라면 $0 = 0 \cdot i < i \cdot i = -1$이 되어 모순이고, $i < 0$이라면 $-1 = i \cdot i > 0 \cdot i = 0$이 되어 모순이다. 따라서 $0 < i$는 의미를 결여한 부등식이다. 이는 $0 < i$가 거짓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0 < i$가 거짓이라면 $0 > i$가 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 https://forum.owlofsogang.com/t/topic/6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