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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에 대한 이론이란 무엇인가?

철학
언어철학

이 글은 Scott Soames, What is a Theory of Truth? (1984)을 정리한 것이다.

초록

필드는 양상 반박을 통해 타르스키의 참 정의가 참의 의미를 해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필드는 인과 이론으로부터 참을 정의하려는 기획을 세웠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필드의 기획 또한 양상 반박에 직면하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논문의 저자는 타르스키의 참 정의가 각 언어별로 참이 무엇인지를 해명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의 재정의를 제안한다.

1. 타르스키의 이론은 무엇을 시도하는가?

참 이론의 세 가지 목적

타르스키의 참 이론의 철학적 의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 수학적 의의와는 다르게, 꾸준한 논쟁의 대상이다. 논쟁이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참에 대한 이론theory of truth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요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참’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한다.
  2. ‘참’을 다른 술어 및 논리 관계로 환원한다.
  3. ‘참’을 선험적인 개념으로 인정한 후 이로부터 철학적 입장을 발전시킨다.

1을 시도하는 이론은 ‘처치의 정리는 참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참이다’와 같이 참 술어가 문장이 아닌 명제에 적용되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타르스키의 참 이론은 오로지 형식적 문장에만 적용되므로, 1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이론은 3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타르스키는 자신의 참 이론이 인식론과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참에 대한 의미론적 정의는 “눈은 희다”라는 문장이 어떤 조건에서 승인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눈은 희다”라는 문장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때, 마찬가지로 “‘눈은 희다’는 참이다”를 승인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제약만을 가한다. 따라서 우리는 참에 대한 의미론적 정의를, 기존의 인식론적 태도에 어떠한 수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소박한 실재론자로 남을 수도 있고, 비판적 실재론자, 관념론자, 경험론자, 형이상학자로도 남아 있을 수 있다.

의미론적 상승

그럼에도 타르스키의 참 술어는, 콰인이 의미론적 상승semantic ascent이라고 부른 기작을 통해 철학적 입장의 명제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형태의 추론들을 일반화하고 싶다고 하자.

  • 눈의 희다 $\to$ (하늘은 푸르다 $\to$ 눈은 희다)
  • 지구는 돈다 $\to$ (태양은 차갑다 $\to$ 지구는 돈다)

자연스러운 일반화는 다음과 같다.

  • 임의의 문장 $p, q$에 대해 ($p$가 참이다 $\to$ ($q$가 참이다 $\to$ $p$가 참이다))

이 형식화에서 참 술어는 나열한 각 사례를 일반화하는 데 불가피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다음과 같이 참 술어에 대한 의존을 없앨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다.

  • 임의의 문장 $p, q$에 대해 $p \to (q \to p)$

그러나 위 문장은 형태론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철학적 문제가 산재해 있는 2차 논리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면, $p, q$는 명제가 아니라 문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장이란 수리논리적인 의미에서의 문장, 즉 자유변수가 없는 명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문장, 즉 기호들의 나열이다. 굳이 수리논리학의 언어를 쓰자면 $p, q$는 문장의 괴델 수이다. 요컨대 1이 아니라 2라는 것이다.

  1. $p =$ 눈은 희다, $q = $ 하늘은 푸르다
  2. $p =$ “눈은 희다”, $q = $ “하늘은 푸르다”

그런데 $\to$는 논리 연산자이므로, 양항에 문장이 아닌 명제가 와야 한다(수리논리학의 언어로는, 괴델 수가 아닌 문장이 와야 한다). 따라서 $p$를, $p$는 참이다 라는 명제로 만들어 줘야 한다. 형식적으로 쓰자면 다음과 같다.

  • $\forall p, q \in \mathbb{N} \;\; T(\ulcorner p \;\dot{\to}\; (q \;\dot{\to}\; p) \urcorner)$

이같은 의미론적 상승 덕분에 몇몇 철학적 입장을 명제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재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어떤 문장 $s$가 존재하여 $s$는 참이지만, 인간의 인식으로는 $s$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참 술어가 철학적 입장의 명제화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일부 철학자는 ‘참’이 철학적으로 심오한 개념이라고 믿었지만, 이미 타르스키와 콰인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순전히 표현의 편의를 위한 사용에 지나지 않으며, 참에 대한 정의 자체는 여타 철학적 입장과 무관하다.

물리주의와 환원

타르스키의 참 이론은 2에 해당하며, 여기에는 그의 철학적 배경이 작용했다. 타르스키는 검소한 물리주의자moderate physicalist였다. ‘검소한’의 의미는 그가 환원의 종착지를 물리학뿐 아니라 논리학과 집합론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물리주의와 호환 가능한 참의 정의를 원했으며, 때문에 참을 선험적 개념으로 인정하고 그 특징에 관한 공리를 나열하는 방식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어떤 집합을 귀납적으로 정의한 다음에, ① 해당 집합을 진리집합으로 가지는 술어가 T-스키마를 모두 함의한다는 사실과, ② 해당 귀납적 정의를 만족하는 집합이 유일함을 보임으로써 참을 집합론으로 환원했다.

현대에 이르러 타르스키의 참 이론은 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본 논문의 저자는 이것이 부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의 주된 골자는 그의 이론이 참에 대한 이론이 응당 갖춰야 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조건들이 사실은 부당하거나 비정합적이기 때문이다.

2. 필드Hartry Field의 비판

타르스키식 정의의 두 단계

필드는 타르스키의 참 정의를 두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원시적 지칭primitive denotation이다. 이 단계에서는 언어 $L$에서 이름 $n$이 대상 $o$를 지칭한다는 것과, 술어 $P$가 대상 $o$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이 정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 이름 $n$은 $L$에서 대상 $o$를 지칭한다 $\iff$ 다음 중 하나가 성립:
    • $n = \text{‘apple’}, o = $ 사과
    • $n = \text{‘banana’}, o = $ 바나나
    • $n = \text{‘coconut’}, o = $ 코코넛
  • 술어 $P$는 $L$에서 대상 $o$에 대해 성립한다 $\iff$ 다음 중 하나가 성립:
    • $P = \text{‘Round’}, o = $ 사과, 코코넛, …
    • $P = \text{‘Long’}, o = $ 바나나, …

두 번째 단계는 참에 대한 재귀적 정의이다. 이 정의는 다음과 같다.

  • 문장 $S$는 $L$에서 참이다 $\iff$ $S \in K$

여기서 $K$는 다음을 만족하는 유일한 집합이다.

  1. 어떤 대상 $o$가 존재하여 $n$이 $o$를 지칭하고 $P$가 $o$에 대해 성립할 때, $\ulcorner Pn \urcorner \in K$
  2. $A \in K$이거나 $B \in K$일 때, $\ulcorner A \lor B \urcorner \in K$
  3. $A \notin K$일 때, $\ulcorner \lnot K \urcorner \in K$

양상 반박과 필드의 기획

필드는 원시적 지칭은 ‘$n$이 $o$를 지칭한다’의 의미를 해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필드에 따르면 지칭 관계는 언어 사용자들의 심리에 의존적이다. 따라서 ‘apple’이 사과가 아닌 바나나를 지칭하는 경우가 가능했다. 그러나 타르스키의 원시적 지칭에서는 $n$이 $o$를 지칭하는 필요충분조건 안에 ‘apple’이 사과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apple’이 사과를 지칭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요컨대 지칭의 정의가 하드코딩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따라서 필드는 지칭에 대한 물리주의적 환원을 제시함으로써 타르스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필드의 기획은 크립키의 이론을 토대로 지칭에 대한 물리-인과적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임의의 화자의 언어 $L$에 대해 올바른 참의 정의를 도출하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필드의 기획의 문제

그러나 필드의 기획에는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인과적 효력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추상적 대상의 지칭이 제기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두 번째 문제는, 필드의 반박대로라면 원시적 지칭이 지칭에 대한 의미를 해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참에 대한 재귀적 정의 또한 참에 대한 의미를 해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참에 대한 재귀적 정의에는 논리 연산자와 관련된 규칙이 하드코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상 반박이 동일하게 유효하다. 일례로 $\lor$이 논리합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우연적이지만, 재귀적 정의에 따르면 “$T(\ulcorner A \lor B \urcorner) \Leftrightarrow T(\ulcorner A \urcorner)$ 또는 $T(\ulcorner B \urcorner)$”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필드는 1과 2뿐 아니라 3, 4, 5, …에 대한 물리주의적 환원 또한 제시해야 한다.

  1. 이름 $n$이 대상 $o$를 지칭한다.
  2. 술어 $P$가 대상 $o$에 대해 성립한다.
  3. 문장 $A$가 문장 $B$의 부정이다.
  4. 문장 $A$가 문장 $B, C$의 논리합이다.
  5. 문장 $A$가 문장 $B$에서 변수 $u$의 존재를 양화한다. (…)

그러나 어떻게 3, 4, 5, …를 참에 대한 순환적 의존 없이 환원할 수 있는가는 불분명하다. 논문의 저자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이 작업에 대한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 예시로 콰인이 진릿값 연산자를 언어 공동체의 집단적 승인 또는 거부로 환원하려고 했던 시도를 거론하는데, 이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Alan Berger, Quine on ‘Alternative Logics’ and Verdict Tables (1980)을 참고하라고 한다. (난 아직 안 읽어봤는데 아마 양상 문제일듯)

덤. Burgess는 Truth에서 필드의 기획이 크립키의 이론에 의존하는 것 또한 문제적이라고 지적한다. 크립키의 이론은 지시에 대한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립키의 이론은 이름 $n$을 사용하여 대상 $o$를 지시하는 최초의 행위가 어떻게 이어짐으로써 이름의 의미론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이론으로, 그의 이론에서 지시는 선험적 개념이다. 크립키 본인도 자신의 이론이 지시에 대한 환원주의라는 세간의 의견에 강하게 반발했다.

3. 의미와 참의 관계

대부분의 언어철학자는 의미와 참이 상호 시사적인 관계에 있음을 인정한다. 일례로 다음을 인정한다.

  • 문장 $S$가 언어 $L$에서 $p$를 의미한다면, $S$가 $L$에서 참일 필요충분조건은 $p$이다.

따라서 일부 철학자들은 타르스키의 참 이론이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 확장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양상 반박은 타르스키의 참 이론이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 연결될 수 없음 또한 보여준다. 예컨데 페아노 산술에 대해 정의한 타르스키의 참 술어는 1을 시사하지만 2를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르스키의 정의는 3을 시사한다.

  1. $T(\ulcorner 1 \;\dot{+}\; 1 = 2 \urcorner) \Leftrightarrow 1 + 1 = 2$
  2. $\dot{+}$의 의미가 곱셈이었다면, $T(\ulcorner 1 \;\dot{+}\; 1 = 2 \urcorner) \Leftrightarrow 1 \times 1 = 2$
  3. $\dot{+}$의 의미가 곱셈이었다면, $T(\ulcorner 1 \;\dot{+}\; 1 = 2 \urcorner) \Leftrightarrow 1 + 1 = 2$

물론 타르스키는 참에 대한 정의가 실질적으로 적합materially adequate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dot{+}$의 의미가 실제로 곱셈이었다면 $T(\ulcorner 1 \;\dot{+}\; 1 = 2 \urcorner) \Leftrightarrow 1 + 1 = 2$를 시사하는 $T$는 올바른 참의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타르스키는 다음을 주장한다. ($\square p$는 $p$가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다)

   a.  $\square($ $T$가 참 술어이다 $\to$ ( 문장 $S$의 의미가 $\phi$이다 $\to$ $\;T(S) \Leftrightarrow \phi$이다 ) $)$

그러나 참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의미에 대한 이론을 유도하려는 접근은 다음의 명제에 의존한다.

   b.  $T$가 참 술어이다 $\to$ $\square($ 문장 $S$의 의미가 $\phi$이다 $\to$ $\;T(S) \Leftrightarrow \phi$이다 $)$

a와 b는 다른 명제이다. 타르스키의 이론은 a를 보장하지만 b는 보장하지 않는다.

4. 새롭게 정의하는 ‘참에 대한 이론’

언어의 본질적 성질로서의 의미

지금까지 살펴 본 타르스키의 참에 대한 비판은, 언어 $L$에서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들이 우연적이어야 함을, 즉 의미론이 $L$의 화자에 의존적임을 전제했다. 그러나 논문의 저자는 이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바라보는 대신, 이름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한 정보 또한 언어의 일부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일례로 1차 논리에서 언어 $L$은 삼중쌍 $\langle S_L, D_L, F_L \rangle$로 간주할 수 있다(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모델론의 언어와 사뭇 다르다. 여기서의 언어는 형태론뿐 아니라 의미론도 가지고 있다).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S_L$: 적형식well-formed formula의 집합
  • $D_L$: 지칭 가능한 대상들의 집합
  • $F_L$: 각각의 이름을 대상에 대응시키는 해석interpretation 함수

이와 같이 언어를 정의할 경우, 타르스키의 참 정의는 임의의 언어 $L$에 대해 실질적으로 적합한 참 술어 $T_L$을 내놓는다. 또한 $F_L$은 튜플의 집합에 불과하므로, 타르스키의 물리주의적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논문의 저자는 언어의 의미론을 그 언어의 본질적 성질essential property로 간주함으로써 타르스키의 참 정의를 일반적인 참의 정의로 승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언어 $L$에서 이름 $n$이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o$가 아닌 다른 대상을 지시했을 경우는 없다. 언어 사용자 집단은 언어에 의미론을 부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선택하는 주체이다. 그리고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를 판단하는 문제는 의미론의 문제가 아닌 화용론의 문제이다.

유형type과 토큰token

필드의 물리주의적 배경은 그가 문장보다 발화utterance에 주목하게끔 만들었다. 필드는 타르스키가 문장에 대한 참의 정의만 제시했을 뿐, 발화에 대한 참의 정의는 제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타르스키가 이 반박을 들었다면, 그는 이 작업이 다음과 같이 두 단계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1. 언어 $L$에서 발화 $u$가 문장 $s$의 발화가 되는 것은 어떤 원리를 통해서인가?
  2. 언어 $L$에서 문장 $s$가 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따라서 타르스키의 정의는 유형 정의이다. 반면 필드는 다음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언어 $L$에서 토큰 $t$가 참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토큰은 종이에 적힌 흑연 자국일 수도 있고, 칠판의 백묵 자국일 수도 있고, 음성일 수도 있다. 즉 필드가 모색하는 것은 토큰 정의이다. 그러나 참에 대한 토큰 정의가 가능하지는 의문스럽다. 필드 본인은 다음과 같이 타르스키의 정의를 변형함으로써 토큰 정의에 도달하고자 시도했다.

  • $\ulcorner \lnot e \urcorner$의 토큰이 참이다 $\Leftrightarrow$ 해당 토큰이 포함하는 $e$의 토큰이 참이 아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위 정의는 $\lnot$의 의미를 부정으로 하드코딩하므로, 똑같이 양상 반론에 직면한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위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 명제 $B$의 부정인 명제 $A$의 토큰이 참이다 $\Leftrightarrow$ 어떤 $B$의 토큰이 거짓이다

하지만 설령 ‘…의 부정이다’가 물리주의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맥락에서 유관한 $B$의 토큰을 어떻게 특정할 수 있는지가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다음 예문을 보자.

기후 위기와 관련된 트럼프의 그 주장은 틀렸다.

트럼프가 기후 위기와 관련하여 한 수많은 발언 토큰들 중 무엇이 위 문장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심지어 $B$의 토큰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 예문을 보자.

트럼프가 윤리학 강의를 진행한다면 대부분의 내용이 틀릴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에서 트럼프는 윤리학 강의를 진행한 적이 없으므로, 위 문장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는 토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 문장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합당해 보인다. 이것은 참에 대한 토큰 정의이 봉착하는 난관을 드러낸다. 이로부터 논문의 저자는 참에 대한 타르스키의 유형 정의를 일단 받아들이고, 언어, 표현, 화자, 그리고 발화 사이의 화용론적 관계가 물리주의로 환원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용론의 문제

비록 논문의 저자는 언어와 화자의 관계를 화용론에 영역에 귀속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언어와 화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철학적 고찰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콰인은 “화자 $A$가 언어 $L$을 사용한다”라는 진술이 물리주의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가바가이 논증). 논문의 저자에 따르면 콰인의 입장은, 타르스키의 참 정의를 받아들이되 언어와 화자의 관계를 물리주의적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참 선제론의 문제

마지막으로 논문의 저자는 참의 개념으로부터 의미에 대한 이론을 유도하려는 시도, 특히 참 개념의 습득이 의미론적 능력semantic competence의 전제 조건이라는 이론 일반은 모두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다음과 같은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참의 개념으로부터 의미에 대한 이론을 유도하려는 시도는 1로부터 2를 주장하고자 한다.

  1. 문장 $S$의 의미가 $p$이다 $\implies$ $S$가 참이다 $\leftrightarrow p$
  2. $S$가 참이다 $\leftrightarrow p$ $\implies$ 문장 $S$의 의미가 $p$이다.

하지만 $\leftrightarrow$를 고전 논리의 동치 관계로 이해하든, 양상 논리의 필연적 동치 관계로 이해하든 간에 2는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음은 필연적으로 성립한다.

  • $1 + 1 = 2 \leftrightarrow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그러나 $1 + 1 = 2$의 의미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인 것은 아니다.

5. 결론

결론적으로 논문의 저자는 참에 대한 이론이 의미에 대한 이론과 직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타르스키의 참 정의와, 그것이 함의하는 참에 대한 축소주의deflationism를 옹호한다. 이것이 참에 대한 이론이 불필요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립키의 참 이론은 타르스키의 참 이론을 실질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발전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참의 성질들을 T-스키마로써 정확히 해명하고, 올바르게 설계된 형태론으로 거짓말쟁이 역설과 같은 모순을 회피하는 데 있다. 참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이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